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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뭐지 종교 다큐멘터리 소설

novel church pcknz 2026. 3. 17. 16:54


믿음이 뭐지 종교 다큐멘터리 소설
뉴질랜드 밀알 선교단
2026. 3. 14. 14:39

모든 밀알 학생 봉사자들에게 바칩니다


제목 믿음이 뭐지
장르 종교 다큐멘터리 소설

뉴질랜드 PCKNZ 교회 오픈 강연 4회의 기록
서충성 목사와 질문하는 청년들의 이야기

— — —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
— 히브리서 11장 1절

— — —

프롤로그 — 오클랜드의 봄, 질문이 피어나다

2025년 9월, 뉴질랜드 오클랜드에는 봄이 왔다.

남반구의 계절은 언제나 낯선 이들을 당혹스럽게 만든다. 한국에서 막 건너온 유학생들은 9월에 두꺼운 패딩을 챙겨왔다가 공항을 나서는 순간 당황하곤 한다. 꽃이 피고, 풀이 돋고, 하늘이 투명하게 높아지는 계절이 9월이라는 사실이 쉽게 납득되지 않는 것이다. 뉴질랜드의 봄은 그런 식으로 사람을 바꿔놓는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실은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음을 깨닫게 만드는 것이다.

PCKNZ(뉴질랜드 한인장로교회) 산하의 한 교회 — 오클랜드 남쪽, 파파토에토에 인근의 작은 예배당 — 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서충성 목사는 그해 봄, 청년들에게 처음으로 제안했다.

"우리 한번 솔직하게 이야기해봅시다. 교회 안에서 궁금했지만 차마 묻지 못했던 것들."

청년들은 처음에 머뭇거렸다. 교회에서 질문을 한다는 것, 그것도 기초적인 질문을 한다는 것은 어쩐지 믿음이 없다는 고백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오래 교회를 다닌 사람일수록 더 그랬다. '이 정도는 알아야지'라는 압박이 사람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을 만들어놓았다.

서 목사는 그 벽을 보고 있었다.

그는 뉴질랜드 밀알선교단의 칼럼을 오래 써온 사람이었다. 장애인 사역을 십수 년간 해오면서, 그는 알게 되었다. 가장 솔직한 질문을 던지는 사람은 언제나 가장 순수한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 대신 눈으로, 논리 대신 존재로 이야기하는 이들 곁에서 그는 배웠다. 믿음이란 완성된 무언가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물음을 던지며 살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오픈 강연회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총 4회. 장소는 교회 친교실. 강단은 없었다. 목사와 청년들이 둥글게 둘러앉는 자리였다. 마이크도 없었고, 강의 노트도 없었다. 서 목사가 가져온 것은 성경 한 권과, 수십 년간 믿음의 현장에서 몸으로 부딪혀온 이야기들뿐이었다.

첫 번째 모임, 누군가 화이트보드에 이렇게 썼다.

"믿음이 뭐지?"

글씨를 쓴 것은 이준서였다. 열아홉 살, 주말마다 밀알선교단 봉사를 나가는 청년. 그의 손에는 항상 장갑이 있었다. 장애인 어르신들의 휠체어를 밀다 생긴 굳은살이 손바닥에 박혀 있었다. 그는 교회에서 가장 열심히 봉사하는 청년이었지만, 동시에 가장 많은 것을 모르는 청년이기도 했다.

아니, 정확히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그는 가장 많은 것을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청년이었다.

— — —

1회 강연 — 믿음이 뭐지?

1.

2025년 9월 10일 수요일 저녁 7시.

친교실 형광등이 켜졌다. 접이식 의자들이 원형으로 배치되었다. 서충성 목사가 제일 먼저 와 앉아 있었다. 청바지에 남색 니트. 목사 가운 같은 것은 없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그런 것들이 오히려 대화를 막는다고 생각했다.

청년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이준서(19세), 김하린(22세, 음대 유학생), 박세준(25세, IT 직장인), 최지아(23세, 간호학과), 정유민(21세, 신학생)이었다. 그리고 뒤늦게 문을 밀고 들어온 한 사람, 뉴질랜드에서 태어난 교포 2세 앤드루 최(Andrew Choi, 20세)가 머쓱하게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서 목사가 말했다.

"오늘부터 네 번, 우리 이야기 해봅시다. 규칙이 딱 하나 있어요. 어떤 질문도 이상한 질문이 없다. 모르면 모른다고 해요. 다 안다고 하면 우리가 할 이야기가 없어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준서가 손을 들었다. 화이트보드를 가리키며 말했다.

"목사님, 저 써도 됩니까?"

"그럼요."

이준서가 일어나 보드마커를 들었다. 그리고 썼다.

믿음이 뭐지?

글씨는 투박하고 크게 쓰여졌다. 반듯하지 않아서 오히려 더 솔직해 보였다.

"저 진짜 모르겠거든요. 교회 나온 지 3년 됐는데. 믿음, 믿음, 믿음 — 맨날 듣는데. 근데 정확히 그게 뭔지 설명하라고 하면... 모르겠어요."

정유민이 약간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신학생으로서 자신이 대신 설명해야 할 것 같은 압박을 느끼는 듯했다. 하지만 서 목사가 먼저 말했다.

"좋아요. 솔직한 질문이에요. 자, 다들 잠깐 생각해봐요. 믿음이 뭔지. 지금 바로 답이 나오면 그걸 말해도 되고, 안 나오면 그것도 솔직하게 이야기해요."

30초의 침묵.

김하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교회 다니는 것? 하나님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

박세준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좀 달라. 교회 다닌다고 믿음이 있는 건 아니잖아요. 저도 습관적으로 다니는 시절이 있었거든요."

최지아가 말했다. "의지하는 거 아닐까요? 병원에서 환자분들 보면, 어떤 분들은 힘들어도 버티잖아요. '하나님이 있다'고 생각해서. 그게 믿음 같기도 하고."

앤드루가 영어로 뭔가 중얼거리다가 다시 한국어로 말했다. "Trust? 신뢰? 관계 같은 건가요."

서 목사가 조용히 들었다. 그는 메모하지 않았다. 그냥 각자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준서가 다시 말했다. "저는 봉사 나가면서 이게 더 헷갈려요. 휠체어 밀면서 찬양 틀어드리면, 어르신들 표정이 변하거든요. 울기도 하시고. 그분들은... 믿음이 있는 거잖아요. 근데 저는 그분들 곁에 있으면서도 내 믿음이 뭔지 모르겠어요."

이 말에 방 안이 잠시 고요해졌다.

2.

서 목사가 입을 열었다.

"옛날에 소크라테스라는 철학자가 있었잖아요. 아테네 광장 다니면서 사람들한테 물어봤대요. 당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그게 정말 무엇인지 설명해보라고. 그런데 막상 설명하려고 하면 다들 모른다는 게 드러났어요. 소크라테스가 한 말이 뭔지 알아요?"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

정유민이 대답했다.

"맞아요. 그게 플라톤의 대화편에 나오는 내용인데. 근데 재밌는 건, 소크라테스가 그렇게 사람들을 무안 주려고 한 게 아니에요. 그는 진짜 알고 싶었던 거예요. 그리고 그 과정 자체가, 무지를 인정하는 그 자리가, 사실은 지혜의 시작이라고 봤어요."

이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 지금 지혜의 시작점에 있는 건가요?"

웃음이 터졌다. 서 목사도 함께 웃었다.

"준서 씨, 그렇게 생각해도 됩니다. 진짜로."

서 목사는 성경을 폈다. 히브리서 11장.

"기독교에서 믿음에 대한 가장 유명한 정의가 여기 나와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 이게 뭔 말인지 혹시 이해돼요?"

침묵.

"저도 처음에 이 구절 봤을 때 이해 못 했어요. 바라는 것들의 실상?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 이게 무슨 뜻인지."

서 목사가 천천히 설명했다.

"원래 헬라어로 보면, 실상이라는 단어가 '휘포스타시스(hypostasis)'예요. 이게 '아래에 놓인 것', '기초', '본질'이라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믿음은 내가 바라는 것들이 이미 존재한다는 확신의 기초, 그 토대가 된다는 뜻이에요."

"보이지 않아도 있다고 확신하는 거요?" 최지아가 물었다.

"확신만은 아니에요. 그 확신이 내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 그게 믿음이에요.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해 실제로 움직이게 만드는 힘."

이준서가 손을 들었다. "그럼 믿음은 감정이에요? 의지예요? 아니면 생각이에요?"

서 목사는 잠시 멈췄다. 이 질문이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좋은 질문이에요. 사실 이게 교회 역사에서 엄청나게 논쟁이 된 주제예요."

3.

서 목사는 잠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화이트보드에 세 단어를 썼다.

Notitia — Assensus — Fiducia

"라틴어예요. 중세 신학자들이 믿음을 이 세 가지 요소로 나눴어요. 노티시아, 아센수스, 피두키아."

그는 각 단어 옆에 한국어로 썼다. **지식 — 동의 — 신뢰**

"믿음에는 이 세 가지가 다 있어야 해요. 첫째, 지식. 내가 무엇을 믿는지 알아야 해요. 하나님이 누구인지,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셨는지. 이게 없으면 막연한 거예요. 두 번째는 동의. 그게 사실이라고 동의하는 것. 지적으로 수긍하는 것.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부족해요."

"왜요?" 박세준이 물었다.

"야고보서에 뭐라고 나오는지 알아요? '귀신들도 하나님이 한 분이신 것을 믿고 떤다.' 귀신도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동의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구원으로 이어지진 않잖아요."

앤드루가 눈을 크게 떴다. "오, 그건 처음 생각해보네요."

"그래서 세 번째가 중요해요. 피두키아, 신뢰. 이건 내 전 존재를 맡기는 거예요. 머리로 아는 것, 마음으로 동의하는 것을 넘어서, 내 삶 전체를 하나님 손에 맡기는 것."

이준서가 다시 말했다. "그럼 저는... 지금 어디까지 온 거예요?"

서 목사가 준서를 바라봤다. 진지하게.

"준서 씨는 매주 봉사 나가잖아요."

"예."

"그 어르신들 곁에서 무언가를 느끼잖아요."

"예."

"그것 때문에 계속 가잖아요. 이유를 논리로 설명하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이잖아요."

이준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눈가가 약간 붉어졌다.

"그게 이미 믿음의 씨앗이에요. 아직 꽃이 아닐 수 있어요. 하지만 씨앗이 없는 사람한테 '왜 꽃이 없냐'고 물을 수는 없잖아요."

— — —

2회 강연 — 믿음의 내용을 찾아서

1.

9월 17일, 두 번째 모임.

이번에는 열두 명이 왔다. 지난 1회 이후 소문이 퍼진 것이다. "목사님이 그냥 다 말해줘." 누군가 카카오톡 단체방에 그렇게 올렸고, 며칠 사이 청년들이 더 왔다.

새로 온 얼굴들 중에 이승환(28세, 의대 졸업 후 뉴질랜드 이민)이 있었다. 그는 한국에서 교회를 다니다가 뉴질랜드에 와서 5년 가까이 교회에 가지 않은 사람이었다. 친구의 권유로, 반신반의하며 왔다고 했다.

서 목사가 시작 전에 말했다.

"지난번에 우리가 믿음이 지식과 동의와 신뢰, 이 세 가지로 이루어진다고 이야기했어요. 오늘은 그럼 믿음의 내용이 뭔지 이야기해봅시다. 즉, 기독교는 무엇을 믿는 거냐."

이준서가 이번에도 먼저 말했다.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맞아요. 근데 그게 다예요?"

정유민이 신학생답게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했다. "성경을 믿는 거요. 구원을 믿는 거요."

"좋아요. 그럼 질문 하나. 이 중에 어느 것이 가장 중요해요?"

침묵이 흘렀다.

이승환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약간 냉소적인 말투였다.

"다 똑같이 중요하다고 하지 않을까요. 교회에서는 늘 그렇게 말하니까."

서 목사가 그를 바라보았다. 물러서지 않고.

"승환 씨, 왜 5년 동안 교회를 안 왔어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이승환이 약간 굳었다.

"그냥... 믿어지지 않았어요. 과학 공부하다 보면, 의학 공부하다 보면. 하나님이 있다는 게 증명이 안 되는데 어떻게 믿냐고."

서 목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질문이 오늘 우리 이야기의 핵심이에요."

2.

서 목사가 화이트보드에 이름 하나를 썼다.

칼 바르트 (Karl Barth, 1886–1968)

"이 사람이 누구냐 하면, 20세기 최고의 신학자로 불리는 사람이에요. 스위스 사람인데,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자기 스승들이 다 전쟁을 지지하는 걸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그리고 이런 질문을 던졌어요. '과연 인간의 이성으로, 인간의 종교로 하나님에게 다가갈 수 있는가?'"

이승환이 눈을 가늘게 떴다.

"바르트의 결론은 이거예요. 아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다. 하나님이 먼저 말씀하셔야 한다. 그래서 그는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로 보는 데 집중했어요. 과학이 하나님을 증명하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없는 게 아니에요. 다른 차원의 이야기거든요."

이승환이 반론을 제기했다. "하지만 목사님, 그건 순환논리 아닌가요? 하나님이 있으니까 성경을 믿고, 성경에 하나님이 있다고 나와 있으니까 하나님을 믿는."

방 안의 청년들이 조용해졌다. 예리한 지적이었다.

서 목사는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맞아요. 그 순환성은 피할 수 없어요. 근데 승환 씨, 과학도 마찬가지예요. 과학이 진리라는 걸 어떻게 증명해요?"

"실험과 증거로."

"그 실험이 신뢰할 만하다는 걸 어떻게 증명해요?"

"방법론으로."

"그 방법론이 옳다는 건 어떻게 증명해요?"

이승환이 멈췄다.

"철학자들이 이걸 '인식론적 순환(epistemic circularity)'이라고 불러요. 어떤 지식 체계든 그 자체를 정당화하는 데는 어느 정도의 순환이 있어요. 기독교 믿음만의 문제가 아니에요. 우리가 출발점을 어디에 두느냐의 차이예요."

이준서가 물었다. "그럼 어디서 시작해야 해요?"

"그게 오늘의 핵심 질문이에요."

3.

서 목사는 또 다른 이름을 썼다.

위르겐 몰트만 (Jürgen Moltmann, 1926–2024)

"이 사람은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포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신학자예요. 폭격 속에서 동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완전히 신앙이 무너졌는데, 수용소에서 성경을 읽다가 다시 만난 거예요. 특히 시편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신 장면에서."

최지아가 조용히 물었다. "그게... 어떻게 도움이 된 거예요? 하나님이 버렸다고 외치는 장면이?"

"몰트만은 이렇게 봤어요. 하나님이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고통 한가운데 함께 계신 분이라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버림받은 그 순간이 사실은 하나님이 인간의 가장 깊은 어둠 속으로 들어오신 순간이라고."

이승환이 흥미를 보였다. 냉소가 약간 걷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래서 몰트만의 신학은 '희망의 신학'이에요. 믿음은 현재의 증거가 없어도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에요. 포로수용소 안에 있는 사람이 '언젠가 이 문이 열릴 것이다'라고 믿고 버티는 것처럼."

이준서가 끼어들었다. "그거 봉사하는 것이랑 비슷한 것 같아요."

"어떻게요?"

"제가 봉사 나가는 장애인 어르신들 중에, 평생 휠체어에 계신 분이 계세요. 말도 못 하세요. 그분이 저한테 뭔가 눈빛으로 말해요. 저는 그게 뭔지 모르는데... 그분은 알고 계신 것 같아요.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방 안이 고요해졌다.

서 목사가 말했다. "그게 바로 희망이에요. 설명이 안 되지만 진짜인 것."

4.

이번 모임에는 특별한 순서가 있었다.

서 목사가 미리 준비한 짧은 글을 읽었다. 뉴질랜드 밀알선교단 칼럼에서 자신이 쓴 글이었다.

— — —

"기독교에서 믿음은 단순히 어떤 것을 사실로 여기고 생각으로 그렇다고 동의하는 믿음을 넘어섭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를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그분이 무엇을 하셨는지에 대한 지적 동의를 포함하지만, 더 나아가 그분의 약속에 전적으로 자신을 맡기는 전인격적 의탁을 뜻합니다."

— — —

"이 글을 쓰면서 저도 오래 생각했어요. 전인격적 의탁이라는 게 뭔가. 내 지성만이 아니라, 내 감정만이 아니라, 내 의지만이 아니라, 나라는 사람 전체를 맡기는 것. 이게 쉬운 게 아니에요."

앤드루가 물었다. "그럼 믿음이 완성되는 순간이 있나요? 아니면 계속 과정인가요?"

"평생 과정이에요. 저도 수십 년 목회를 하면서 아직도 믿음이 흔들릴 때가 있어요. 믿음이 완성됐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오히려 위험해요. 그게 바리새인들의 함정이었거든요."

이승환이 조용히 말했다. "그럼 의심은... 믿음의 반대가 아닌가요?"

서 목사가 미소를 지었다. "의심은 믿음이 살아있다는 증거일 수 있어요. 죽은 믿음은 의심도 안 해요. 그냥 관습이 되거든요."

— — —

3회 강연 — 행함과 믿음 사이, 그 좁고 아름다운 길

1.

9월 24일, 세 번째 모임.

이번 주에는 이준서가 봉사를 마치고 바로 달려왔다. 옷에서 아직 땀 냄새가 났다. 그는 미안하다고 했지만, 누구도 개의치 않았다.

서 목사는 오늘 조금 다른 방식으로 시작했다.

"오늘은 내가 먼저 질문을 할게요. 믿음과 행함, 어느 게 먼저예요?"

정유민이 바로 말했다. "믿음이요. 믿음이 있어야 행함이 나오는 거잖아요."

이준서가 고개를 기울였다. "근데 저는 솔직히 봉사를 먼저 시작했어요. 믿음이 생겨서 봉사를 시작한 게 아니라, 봉사를 하다 보니까 뭔가가 생긴 거 같아요."

박세준이 흥미롭다는 듯 끼어들었다. "그게 다른 사람들도 그렇지 않을까요? 저도 처음에 교회 나가기 싫었는데 부모님 따라가다 보니까 어느 순간 믿어지더라고요."

"중요한 이야기를 지금 하고 있어요." 서 목사가 말했다.

그는 화이트보드에 썼다. **마르틴 루터 vs 야고보**

"종교개혁 때 마르틴 루터가 이런 말을 했어요.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 '솔라 피데(Sola Fide).' 이게 중세 교회가 '선행을 해야 구원받는다'는 잘못된 가르침에 대한 반격이었어요. 루터는 야고보서를 별로 안 좋아했어요. 심지어 그 편지를 '지푸라기 편지'라고 불렀어요."

"왜요?" 최지아가 물었다.

"야고보서에 이런 말이 나오거든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루터 입장에서는 이게 자기가 강조하는 '오직 믿음'과 충돌처럼 보였던 거예요."

"그럼 성경이 서로 모순되는 건가요?" 이승환이 예리하게 물었다.

"좋은 질문이에요. 사실 이 둘은 모순이 아니에요. 다만 강조점이 달라요. 바울이 말하는 '믿음'과 야고보가 말하는 '믿음'은 문맥이 달라요. 바울은 구원의 근거를 이야기한 거예요. 하나님의 눈에 우리가 어떻게 의롭게 되는가. 야고보는 그 믿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를 이야기한 거예요."

2.

앤드루가 손을 들었다. 영어와 한국어를 섞어 말했다.

"그러면... 믿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어떻게 알아요?"

서 목사가 잠시 생각했다.

"플라톤의 대화편 중에 '메논'이라는 작품이 있어요. 거기서 소크라테스가 이런 질문을 해요. '덕이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덕을 가르칠 수 있는가?' 메논은 처음에 쉽게 대답하려다가,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계속 막혀요. 결국 그들이 도달한 결론은, 덕은 배우는 것이 아니라 '상기'하는 것, 즉 영혼 안에 이미 있는 것을 기억해내는 것이라는 거예요."

"믿음도 그래요?"

"비슷한 면이 있어요. 기독교에서는 이걸 '내주하시는 성령'이라고 말해요. 믿음은 인간 바깥에서 찾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우리 안에 심어놓으신 씨앗을 자라게 하는 것. 그래서 믿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그 씨앗이 열매로 나타나는지 보면 알아요."

"열매가 뭔데요?" 이준서가 물었다.

"사랑이에요. 가장 단순하게 말하면."

이준서가 조금 멈칫했다. "그럼 저는... 봉사가 사랑인지 아닌지도 모르겠어요. 그냥 좋아서 가는 건데."

"좋아서 가는 게 사랑이에요."

"그렇게 쉬워요?"

서 목사가 말했다. "쉬운 게 아니에요. 준서 씨가 매주 그 자리에 가는 것이 쉬운 일인 줄 알아요? 많은 사람들이 '언젠가 봉사 한번 해봐야지'라고 생각하면서 평생 안 가요. 근데 준서 씨는 가잖아요. 그게 믿음이 행동으로 나온 거예요."

3.

이승환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근데 저는 믿음이 없어도 좋은 일 하는 사람 많이 봤어요. 의사 일 하면서. 불교 신자도, 무신론자도 정말 헌신적인 사람들 많아요. 그분들도 믿음이 있는 건가요?"

방 안이 조용해졌다.

서 목사는 이 질문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서두르지 않고 말했다.

"이 주제에 대해 초대교회 때부터 논쟁이 있었어요. 에큐메니칼 신학에서 이걸 '익명의 기독교인' 논의라고 해요. 카를 라너(Karl Rahner)라는 예수회 신학자가 이런 주장을 했어요. 예수님을 명시적으로 알지 못하지만 그 분의 빛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그 주장이 맞아요?" 박세준이 물었다.

"논쟁적이에요. 보수적인 신학자들은 '오직 예수만이 구원의 길'이라는 요한복음 14장 6절을 근거로 반대하고. 진보적인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자비가 우리의 신학적 경계보다 넓을 수 있다고 봐요."

"목사님은 어떻게 생각해요?" 이준서가 직접 물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서 목사가 말했다.

"저는 하나님을 너무 작은 상자에 넣지 않으려고 해요.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계시가 가장 명확한 하나님의 자기 표현이라는 것도 믿어요. 이 두 가지 사이의 긴장을 안고 사는 게 신앙인 것 같아요."

이승환이 말했다. "그게 더 솔직하게 느껴지네요."

서 목사가 미소 지었다. "신앙이 솔직하지 않으면 오래 못 가요."

4.

세 번째 모임이 끝날 무렵, 이준서가 남아서 서 목사에게 물었다.

"목사님, 저 한 가지만 물어봐도 돼요?"

"그럼요."

"믿음이 없는 사람도 봉사할 수 있잖아요. 근데 봉사하면서 믿음이 생기기도 하잖아요. 그럼 믿음이 먼저인지 봉사가 먼저인지가 그렇게 중요한 거예요?"

서 목사가 한동안 이준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같은 질문이에요. 근데 이거 알아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사실 답이 있어요. 진화생물학으로 보면 달걀이 먼저예요. 닭이 되기 전의 새가 낳은 달걀에서 닭이 나온 거니까."

이준서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믿음이랑 무슨 상관이에요?"

"믿음이 먼저예요. 우리가 느끼기 전에, 우리가 선택하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향해 움직이셨어요. 준서 씨가 봉사를 시작하게 된 것도, 어느 누군가의 권유가 있었고,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이 먼저 준서 씨에게 오신 거예요."

이준서는 오래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그럼 저는 지금 그분의 움직임 안에 있는 건가요?"

"지금 이 자리에 있잖아요. 그게 답이에요."

— — —

4회 강연 — 믿음의 결실, 그리고 멀어져간 것들에 대하여

1.

10월 1일, 마지막 모임.

교회 친교실에 이번에는 스무 명 가까이 모였다. 소문이 더 퍼진 것이었다. 처음 오는 얼굴들도 있었다. 젊은 부부, 노인 한 명, 심지어 교회 장로님 한 분이 조용히 뒤에 앉으셨다.

서 목사가 오늘은 조금 다르게 시작했다.

그는 우선 아무 말 없이 화이트보드에 이렇게 썼다.

믿음에서 멀어져간 것들

"오늘 마지막 모임이에요. 지금까지 우리가 믿음이 뭔지, 믿음의 내용이 뭔지, 믿음과 행함이 어떤 관계인지 이야기했어요. 오늘은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기독교가, 교회가, 믿음에서 왜 멀어지게 되었는가."

조용한 긴장이 흘렀다.

장로님이 뒤에서 약간 몸을 움직이셨다.

"이게 불편한 이야기일 수 있어요. 근데 솔직하게 이야기하지 않으면, 다음 세대가 교회를 떠나는 걸 막을 수 없어요. 이미 그 일이 일어나고 있고."

이승환이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2.

서 목사가 또 하나의 이름을 썼다.

도로테 죌레 (Dorothee Sölle, 1929–2003)

"독일의 여성 신학자예요. 에큐메니칼 신학자로, 평화운동과 해방신학에도 깊이 관여했어요. 그녀가 이런 말을 했어요. '하나님 없는 기독교(Christendom without God)'가 가능한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무엇을 해왔는가'를 물어야 한다고."

박세준이 말했다. "맞아요. 교회가 권력이 되는 순간... 달라지잖아요."

"역사적으로 그랬어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삼은 313년 이후, 교회는 권력과 함께 하게 되었어요. 그 과정에서 믿음의 본질이 제도와 권력으로 대체되는 일이 일어났어요."

최지아가 조용히 물었다. "그럼 지금도 그런 게 있지 않을까요? 교회 안에서."

서 목사가 솔직하게 말했다.

"있어요. 목회자인 저도 그런 유혹을 느껴요. 권위를 믿음의 이름으로 포장하고 싶은. 그게 인간의 본성이에요. 그래서 계속 자기 자신을 점검해야 해요."

뒤에 앉으셨던 장로님이 처음으로 말씀하셨다.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목사님, 오늘 이 자리가 바로 그 점검인 것 같습니다."

서 목사가 장로님께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3.

이준서가 손을 들었다. 이번 강연 내내 그는 뭔가 생각하는 것 같았다. 눈이 깊어 있었다.

"목사님, 제가 이번에 생각해온 게 있는데요."

"말해요."

"봉사하면서 어르신들 보면... 평생 교회 다니신 분도 계시고, 한번도 교회 안 다니신 분도 계세요. 근데 솔직히 그분들한테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어요. 그분들한테는 이론이 없어요. 신학도 없어요. 그냥... 하루하루 사시는 거잖아요."

"그래요."

"그분들한테도 믿음이 있을 수 있어요?"

서 목사가 말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영웅들을 보면 흥미로운 게 있어요. 아브라함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갔어요. 모세는 이집트의 영화를 버리고 광야를 선택했어요. 라합은 창녀였는데도 믿음의 영웅으로 나와요. 공통점이 뭔지 알아요?"

"뭐예요?"

"다들 완벽한 신학이 없었어요. 근데 다들 무언가를 향해 움직였어요.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해."

이준서의 눈이 촉촉해졌다.

"그럼 그 어르신들도... 그분들의 방식으로 무언가를 향해 살고 계신 거잖아요."

"그렇게 생각해요. 저는."

"목사님은 그게 믿음이라고 보세요?"

서 목사가 잠시 천장을 바라보았다.

"하나님만 아셔요. 그분의 마음이 얼마나 넓은지. 우리가 그 경계를 정할 수 없어요."

4.

서 목사가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우리가 4주 동안 믿음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결국 한 가지로 돌아와요. 믿음은 정보가 아니에요. 관계예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그는 잠시 멈추었다가 계속했다.

"플라톤이 '향연(Symposium)'이라는 작품에서 소크라테스를 통해 이런 이야기를 해요. 사랑은 충만한 것이 아니라 결핍에서 나온다고. 사랑의 신 에로스는 풍요의 신과 결핍의 신의 아들이에요. 그래서 사랑은 늘 무언가를 갈망하는 상태에 있어요. 가지지 못한 것을 향해 뻗어나가는 것."

"믿음도 그래요?"

"믿음도 그런 면이 있어요. 우리가 완전히 하나님을 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믿음이 필요해요. 이미 다 본 것은 믿을 필요가 없잖아요.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라고 했어요. 지금 우리의 믿음은 희미한 거울 앞에 서 있는 거예요."

김하린이 조용히 말했다. "그게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것 같아요."

"맞아요. 믿음의 여정에서 희미한 거울을 바라보는 것이 때론 슬프고 때론 아름다워요. 의심도 있고, 두려움도 있고, 기쁨도 있어요."

이승환이 마지막으로 물었다.

"목사님, 저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오늘 4주 동안 와서 들으면서, 믿음이 뭔지 더 알게 된 것 같기도 하고, 더 모르게 된 것 같기도 해요."

서 목사가 웃었다. 진심으로.

"그게 정상이에요. 소크라테스가 말했잖아요. 무지를 아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라고. 4주 전에 모른다는 것도 몰랐던 사람이, 이제는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게 엄청난 진보예요."

승환이 조금 웃었다. "그게... 위로가 되네요."

— — —

에필로그 — 오클랜드의 여름을 향해

1.

4회 강연이 끝난 후, 청년들이 삼삼오오 남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누군가 아이스크림을 사왔다. 치약 냄새 나는 민트 초코, 달콤한 바닐라, 상큼한 망고. 뉴질랜드의 아이스크림은 언제나 좋았다.

이준서는 서 목사 옆에 앉아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아이스크림을 핥다가 조용히 물었다.

"목사님, 저 이제 믿음이 생긴 걸까요?"

서 목사가 말했다.

"그 질문을 하는 사람한테 믿음이 없을 수 없어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믿음을 원하는 마음이 이미 믿음의 시작이에요. 하나님께 닿고 싶다는 갈망 자체가 이미 하나님이 그 사람 안에 무언가를 심어놓으신 증거예요."

이준서가 잠시 아이스크림을 바라보았다.

"저 내주도 봉사 가요."

"알아요."

"봉사 가는 게 맞는 건지, 제가 뭘 얻으려고 가는 건지, 그냥 좋아서 가는 건지 아직도 헷갈려요."

"헷갈린 채로 가는 게 맞아요."

"왜요?"

서 목사가 웃으며 말했다. "다 알고 가는 사람은 배울 게 없거든요. 모르는 채로 가야 배워요."

2.

이승환은 그날 처음으로 교회 청년부 단체방에 가입했다.

대단한 선언은 없었다. 그냥 조용히. 누군가 "어서 와요"라고 했고, 그는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답했다.

그가 나중에 이준서에게 톡을 보냈다.

"야, 근데 나 아직도 하나님이 있는지 잘 모르겠거든. 그래도 와도 되냐?"

이준서가 답했다.

"저도 모르는데 다니는데요. 같이 모르면 되죠."

이승환이 웃음 이모티콘을 보냈다.

3.

앤드루는 집에 돌아가는 길에 에어팟으로 음악을 들으며 걸었다. 뉴질랜드 밤하늘에는 별이 많았다. 그는 한참 걷다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영어로 중얼거렸다.

"God, if you're there... I don't know what I'm doing. But I'm trying."

번역하면 이렇다. "하나님, 거기 계신다면... 저 뭘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해보려고요."

그것으로 충분했다.

4.

서충성 목사는 그날 밤 늦게 서재에 앉아 뉴질랜드 밀알선교단 칼럼을 썼다.

그는 오래 생각하다가 제목을 이렇게 붙였다.

"믿음이 뭐지? — 질문하는 청년들에게 배운 것들"

그리고 이렇게 썼다.

— — —

4주 동안 청년들과 이야기하면서 나는 오래된 진리를 다시 발견했습니다.

믿음은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살아있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것은 자랍니다. 자라기 위해서는 흔들려야 합니다. 흔들리기 위해서는 바람이 와야 합니다.

청년들이 던진 질문들이 그 바람이었습니다.

"믿음이 뭐지?"라는 질문 하나가, 지식이 되고 동의가 되고 신뢰가 되는 과정을 함께 걸었습니다. 플라톤의 소크라테스가 말했듯이, 무지를 아는 것이 지혜의 시작입니다. 그 자리에 청년들이 서 있었고, 나도 다시 그 자리에 섰습니다.

히브리서는 말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그 실상과 증거를 움켜쥐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향해 걸어가는 것이 믿음의 여정임을 새삼 배웠습니다.

매주 장애인 어르신들의 휠체어를 밀며 봉사하는 열아홉 살 청년이, 사실은 저에게 믿음을 가르쳐주었습니다.

그 아이는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모르면서도 갑니다. 그게 믿음입니다.

— — —

5.

10월이 되었다.

오클랜드의 봄은 이미 여름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자카란다가 보라색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이 나무는 뉴질랜드가 원산지가 아닌데, 누군가 오래전에 심어놓은 것이 퍼진 것이라고 했다.

이준서는 그날도 봉사를 갔다. 휠체어를 밀면서, 어르신 한 분의 눈빛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 눈빛 안에 무엇이 있는지 여전히 몰랐다. 하지만 이제 그 모름이 두렵지 않았다.

그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믿음이 뭔지 아직 모르겠다. 근데 이 자리가 맞는 것 같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 순간, 뉴질랜드의 봄 햇살이 교회 창문을 통해 비스듬히 들어왔고, 어르신의 흰 머리카락 위로 빛이 떨어졌다.

이준서는 그 빛을 오래 바라보았다.

— — —

부록 — 대화편: 플라톤식 믿음의 탐구

아래는 서충성 목사가 강연 중에 참조한 플라톤의 대화 방식을 빌려, 믿음에 관한 가상의 대화를 재구성한 것입니다.

— — —

**소크라테스:** 준서여, 그대는 봉사를 하는가?

**준서:** 예, 저는 매주 장애인 어르신들을 도우러 갑니다.

**소크라테스:** 그리고 그대는 믿음이 있는가?

**준서:** 잘 모르겠어요.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소크라테스:** 흥미롭군. 그렇다면 묻겠네. 믿음이 없는 사람이 봉사를 할 수 있는가?

**준서:** 할 수 있죠. 저를 봐요.

**소크라테스:** 그렇다면 봉사는 믿음 없이 가능한가?

**준서:** 예, 그런 것 같아요.

**소크라테스:** 그런데 그대는 왜 봉사를 하는가?

**준서:** 좋아서요. 그냥 그분들 곁에 있으면 뭔가 느껴지거든요.

**소크라테스:** 그 '뭔가'가 무엇인가?

**준서:** 모르겠어요.

**소크라테스:** 모르는 것을 향해 가는 것이 믿음 아닐까?

**준서:** ...

**소크라테스:** 알고 있는 것을 향해 가는 것은 믿음이 아닐세. 지식이지. 믿음은 알지 못하는 것을 향해, 그러나 확신하며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준서:** 그럼 저는 믿음이 있는 건가요?

**소크라테스:** 그대가 봉사를 하고, 그대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을 향해 움직인다면, 그대에게 이미 믿음이 있는 것이네. 다만 아직 그 이름을 모를 뿐이지.

— — —

또 다른 대화 — 에큐메니칼 교수와의 상상의 대담

— — —

**신학생 정유민:** 교수님, 초대교회에서 믿음은 어떻게 이해되었나요?

**에큐메니칼 교수(가상의 인물, 1세기 안디옥 교회 신학자 스타일):** 초대교회에서 믿음, 즉 그리스어 '피스티스(pistis)'는 단순한 교리적 동의가 아니었소. 그것은 관계의 언어였소.

**유민:** 어떤 관계입니까?

**교수:** 로마 시대의 '피스티스'는 신뢰, 충성, 헌신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소. 로마의 장군이 황제에게 피스티스를 맹세한다는 것은 목숨을 거는 충성이었소. 초대교회는 그 언어를 가져와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 헌신, 신뢰를 의미하는 데 사용한 것이오.

**유민:** 그러면 믿음은 감정이 아니었군요.

**교수:** 감정이기도 하고, 행동이기도 하고, 관계이기도 했소. 한 가지로 축소할 수 없었소. 그것이 초대교회의 풍요로운 믿음의 이해였소.

**유민:** 지금 교회에서는 믿음이 때로 교리의 동의 정도로 축소된 것 같아요.

**교수:** 그것이 역사적 문제요. 믿음이 제도화될 때, 그 살아있는 관계성이 희미해지는 경향이 있소. 그래서 계속해서 근원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시오. '너희가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어린 아이의 믿음이란 무엇인가? 설명이 없는 신뢰요. 이론이 없는 의지요.

**유민:** 이준서 씨가 딱 그런 것 같아요.

**교수:** 그렇다면 그 청년에게서 많이 배우시오. 신학이 때로 믿음을 가르치려 하는데, 사실은 삶이 신학을 가르치는 경우가 더 많다오.

— — —

마지막 장 — 믿음은 지금 여기에

서충성 목사는 4주간의 오픈 강연을 마치고 혼자 교회 예배당에 앉아 있었다.

불은 껐다. 창밖으로 오클랜드의 밤이 펼쳐졌다. 멀리서 비행기 불빛이 깜박였다. 누군가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오는 사람도 있고, 가는 사람도 있는 곳이 뉴질랜드였다.

서 목사는 성경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히브리서 11장을 다시 읽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

그는 이 구절을 수백 번 읽었다. 수십 년 동안. 그런데 오늘은 조금 달랐다. 이준서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승환의 냉소가 서서히 녹던 순간이 떠올랐다. 앤드루가 하늘을 보며 중얼거리던 것이 떠올랐다.

믿음은 이론이 아니었다.

믿음은 이 사람들이었다. 모르면서도 오는 사람들. 흔들리면서도 버티는 사람들. 질문하면서도 떠나지 않는 사람들.

서 목사는 오래 앉아 있었다.

그리고 조용히 기도했다.

"하나님, 저도 아직 다 모릅니다. 그런데 여기 있습니다."

창밖으로 바람이 지나갔다.

자카란다 꽃잎 하나가 교회 유리창을 스쳐지나갔다.

보라색이었다.

— — —

작가의 말

이 소설은 뉴질랜드 오클랜드의 PCKNZ 교회를 배경으로 한 가상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야기 속의 질문들은 가상이 아닙니다. "믿음이 뭐지?"라는 질문은 오늘도 수많은 청년들의 입에서, 마음속에서 살아있습니다.

뉴질랜드 밀알선교단의 사역과 칼럼에서 영감을 받아 이 이야기를 썼습니다. 장애인 어르신들 곁에서 묵묵히 봉사하는 모든 이준서들에게 이 소설을 바칩니다.

믿음은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 길이 불확실하고 때로 어두울지라도, 모르면서도 함께 걷는 사람들이 있는 한, 길은 있습니다.

"믿음이 뭐지?"

아직 모르셔도 됩니다. 함께 걸어가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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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신학자 및 출처

- 칼 바르트 (Karl Barth) — 교회교의학 (Kirchliche Dogmatik)
- 위르겐 몰트만 (Jürgen Moltmann) — 희망의 신학 (Theologie der Hoffnung)
- 도로테 죌레 (Dorothee Sölle) — 신비와 저항
- 카를 라너 (Karl Rahner) — 익명의 기독교인론
- 플라톤 — 대화편: 메논, 향연, 국가
- 히브리서 11장 1절 (개역개정)
- 야고보서 2장 26절
- 요한복음 14장 6절
- 뉴질랜드 밀알선교단 칼럼 (2025.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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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정보
- 제목: 믿음이 뭐지
- 배경: 뉴질랜드 오클랜드, PCKNZ 교회
- 형식: 종교 다큐멘터리 소설
- 구성: 4회 오픈 강연 + 프롤로그/에필로그
- 주요 등장인물: 서충성 목사, 이준서(19세), 이승환(28세), 김하린, 박세준, 최지아, 정유민, 앤드루 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