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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을 탐구하다 — 낭만과 양자역학과 신학 사이에서 —탐구소설

novel church pcknz 2026. 3. 16. 17:32




영원을 탐구하다
— 낭만과 양자역학과 신학 사이에서 —
탐구소설
유튜브 채널 「겸석은 힘들다: 신학특집」

— 오프닝 —
낭만에 대하여 - 최덕호 / 이 노래는 영원을 동경하는 인간의 마음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이 소설도 같은 질문에서 시작한다. 영원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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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채널 「겸손은 힘들다: 신학 특집」 - 구독자 120만 / 영원 편 #1]

썸네일: 양자역학 박사 + 목사 + 기자 + 신학생 = 영원에 대한 난상토론 🔥

영상이 시작되면, 검은 배경에 하얀 자막이 떠오른다.

"이 프로그램은 세금을 내는 시청자 여러분의 지적 호기심으로 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온다.

프롤로그 — 낭만에 대하여, 그리고 영원에 대하여

2026년 3월의 첫 주, 서울 마포구 어느 스튜디오.

조명이 켜지기 전, 무대 뒤에서 진행자 김준영이 커피를 홀짝이며 큐카드를 훑어보고 있었다. 그는 이 채널 「겸석은 힘들다」의 MC다. 원래 정치 토론 프로그램을 7년 만들다가 어느 날 갑자기 "지적 허기증"이 생겨서 인문학 채널로 전향한 인물. 머리는 반백이고, 안경은 항상 코끝에 걸쳐 있으며, 말투는 느리지만 질문은 항상 날카롭다.

"오늘 주제가 영원이라고요? 진짜요?"

PD 한태양이 헤드셋을 고쳐 쓰며 대답했다. "네. 어떤 블로그 글 하나가 화제가 됐는데, 영원에 대해 썼거든요. 그런데 댓글이 난장판이 됐어요."

"어떻게요?"

"절반은 '감동받았다'고 하고, 나머지 절반은 '이게 기독교냐 철학이냐 불교냐'며 싸우고 있어요."

김준영이 안경을 추켜올리며 빙긋 웃었다. "좋아요. 우리 채널 냄새가 나는군요."

오늘 패널은 총 다섯 명이었다.

첫 번째, 이요한 — 서울신학대학원 3학기 신학생. 나이 스물여덟. 원래 컴퓨터공학과를 나왔다가 군대 다녀와서 갑자기 신학대에 들어간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 말투가 직접적이고, 모르면 모른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스타일.

두 번째, 박양자 박사 — KAIST 물리학과 출신, 현재 양자역학 연구원. 나이 서른넷. 이름이 "양자"인 것은 부모님이 물리학자여서가 아니라 순전한 우연이지만, 본인은 이걸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신앙은 없지만 과학적으로 종교를 탐구하는 것에 매우 흥미가 있다.

세 번째, 카림 알-파루크 — 중동 전문 기자. 레바논 태생으로 한국에 귀화한 지 15년째. 기독교·이슬람·유대교가 공존하는 레바논에서 자랐기 때문에 종교에 대해 입체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 유머감각이 뛰어나고, 어떤 민감한 질문도 일단 웃으면서 시작한다.

네 번째, 이윤혜 — 블로거이자 프리랜서 작가. 나이 서른하나. 이번 소동의 발단이 된 블로그 글 「영원이라는 개념이란 무엇인가」의 작성자 shalom873 본인이다. 원래 마케터였다가 코로나 시기에 철학·신학 공부에 빠져들었다. 순수하고 열린 마음으로 질문하는 스타일인데, 자기 글이 이렇게 큰 토론을 일으킬 줄은 몰랐다며 당황해하고 있다.

다섯 번째, 서충성 목사 — 강남 어느 교회 담임목사지만, 강의 스타일이 학자에 가깝다. 신학 박사 학위도 있고, 일반인 대상 열린 강의를 10년째 하고 있다. 설교할 때 칠판에 도표를 그린다고 소문난 목사. 목소리가 낮고 따뜻하며, 복잡한 것을 쉽게 설명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그리고 어딘가 구석에, 아직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 여섯 번째 인물이 있었다. 출판사 편집장 최서인 — 이 자리에 초대받은 것이 아니라, 오늘 다른 미팅 때문에 스튜디오를 방문했다가 토론이 재미있을 것 같아서 그냥 눌러 앉은 인물이다. 실용주의자이며, 언제나 "그래서 그게 내 인생에 어떻게 쓸모 있죠?"라는 질문을 먼저 던진다.

조명이 켜졌다.

김준영이 카메라를 향해 말했다.

"안녕하세요, 겸석은 힘들다입니다. 오늘은 좀 다른 주제를 가져왔습니다. 보통 저희가 정치, 경제, 사회 이야기를 하는데, 오늘은... 영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잠깐 침묵.

"어색하죠? 저도 어색합니다. 하지만 어색한 질문이 진짜 질문인 경우가 많더라고요."

이윤혜가 살짝 손을 들었다. "저, 혹시 제가 오늘 공격받는 건 아니죠?"

웃음이 터졌다.

"전혀요," 김준영이 말했다. "오히려 선생님 글 덕분에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일 수 있었으니까요. 시작은 선생님 블로그지만, 오늘 우리가 탐구할 것은 훨씬 더 깊은 곳까지 들어갈 겁니다. 자, 그럼 시작해볼까요?"

그가 첫 번째 슬라이드를 가리켰다. 화면에 나타난 건 최덕호의 노래 가사였다.

♪ *낭만에 대하여 / 그대는 아는가...*

"왜 낭만으로 시작하냐고요? 낭만(浪漫)이 뭔지 알아요? 원래 로맨스(romance)의 음역어입니다. 그런데 로맨스의 어원은 라틴어 'romanice'인데, 로마 제국의 이야기, 전설, 서사시를 뜻해요. 쉽게 말하면 — 인간이 현실 너머를 동경하는 마음이에요. 영원을 그리워하는 마음. 그게 낭만입니다. 최덕호 선생님이 이 노래를 만들 때, 그분이 노래한 것도 결국 그겁니다. 지금 여기를 넘어선 무언가에 대한 그리움."

서충성 목사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박양자 박사가 노트를 펼쳤다.

이요한이 뭔가를 공책에 받아 적었다.

카림이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저도 레바논에서 그 노래 들었어요. 아랍어 버전은 없지만."

최서인 편집장이 커피를 마시며 중얼거렸다. "책으로 나오면 팔릴 것 같은데."

이렇게 토론이 시작됐다.

제1장 — 블로그에서 시작된 전쟁 (이윤혜의 고백)

김준영이 태블릿을 들어 올렸다.

"자, 먼저 오늘 토론의 출발점이 된 이 글을 보겠습니다. 블로거 shalom, 즉 이윤혜 선생님이 쓰신 「영원이라는 개념이란 무엇인가」입니다. 일단 핵심만 요약하면: 영원을 무한한 시간과 시간을 초월한 존재, 두 가지로 나눴고요. 철학·종교·과학·인간 경험 네 가지 관점에서 다뤘습니다. 선생님, 이 글을 왜 쓰게 됐어요?"

이윤혜가 조금 긴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실 제가 코로나 때 굉장히 힘든 시기를 보냈어요. 회사도 그만두고, 관계도 끊어지고... 그때 처음으로 '영원'이라는 단어가 제 머릿속에 걸리기 시작했어요. 우리가 이렇게 잠깐 살다 가는데, 이게 다인가? 라는 질문이요."

"종교적 맥락에서요?"

"처음엔 그냥 철학적인 궁금증이었어요. 그래서 이것저것 찾아보다가 정리해서 블로그에 올렸는데... 댓글이 폭발했죠."

카림이 웃으며 끼어들었다. "저도 댓글 봤어요. '이건 신학이 아니다'부터 시작해서 '불교를 오해했다', '과학을 너무 단순화했다'... 뭐 그런 것들이 , 그냥 '이런 것들이 있더라'를 정리한 거였는데, 모든 분야의 전문가들이 각자 자기 영역을 지키는 댓글을 달아주셨죠. 솔직히 말하면 좀 충격이었어요. 내가 뭔가 잘못 썼구나, 싶었고요."

서충성 목사가 온화하게 말했다. "선생님 글에 잘못된 것은 많지 않아요. 다만 기독교적 관점에서는 핵심 한 가지가 빠져 있는 것처럼 느껴졌을 거예요. 그게 사람들을 답답하게 만든 거겠죠."

"그게 뭔가요?"

서 목사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선생님 글에서 영원은 개념이에요. 범주예요. 철학적 상자 같은 것. 그런데 기독교에서 영원은 인격이에요. 어떤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이름을 가진 분이에요."

이요한이 손을 들었다. "그 차이가 왜 중요해요? 실용적으로 생각했을 때."

최서인 편집장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맞아요, 저도 그 질문이 궁금한데요. 영원이 개념이든 인격이든, 그게 내 삶에 어떤 차이를 만들어요?"

김준영이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오, 편집장님이 오늘 가장 핵심적인 질문을 던지셨는데요. 우리 오늘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 봅시다. 패널분들, 각자 한 마디씩만 먼저 해주시겠어요? '영원이 개념이냐 인격이냐'가 삶에 어떤 차이를 만드는지."

박양자 박사가 먼저 말했다. "과학자 입장에서는 솔직히, 영원이 인격이라는 건 증명할 수 없는 주장이에요. 하지만 그 주장이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는 관찰할 수 있죠. 그게 저한테는 더 흥미로운 질문이에요."

카림이 말했다. "저는 세 개의 종교가 공존하는 나라에서 자랐어요. 기독교·이슬람·유대교 다 '영원하신 하나님'을 믿어요. 그런데 그 믿음이 만들어내는 삶의 모습은 달라요. 왜 그럴까, 항상 궁금했어요."

이요한이 말했다. "저는 영원이 개념으로만 남아 있을 때랑, 그분이 내 삶에 개입하신다는 믿음이 생겼을 때가 완전히 달랐어요. 개념은 위로가 안 되거든요."

서충성 목사가 말했다. "맞습니다. 태풍 속에서 '폭풍이란 대기압 차이로 인한 현상'이라는 지식이 있어도, 그 지식이 여러분을 지키진 않아요. 하지만 폭풍 너머에 이미 항구가 있다는 믿음은 달라요."

이윤혜가 조용히 메모를 했다.

최서인 편집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비유는 책에 쓸 수 있겠는데요."

웃음이 터졌다.

김준영이 말했다. "자, 그럼 우리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들어가 봅시다. 시간 여행을 하겠습니다. 2세기부터 21세기까지. 인류 역사상 영원을 가장 깊이 생각한 사람들을 차례로 만나볼 거예요. 그리고 그들이 오늘 이 자리에 패널로 앉아 있다면 뭐라고 했을지, 우리가 대신 해석해드리겠습니다. 준비됐어요?"

다섯 명이 동시에 "네"라고 대답했다.

최서인이 0.5초 늦게 "네..."라고 했다.

제2장 — 알렉산드리아의 뜨거운 교실 (클레멘스와 오리게네스)

[자막: 기원후 180-250년경,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화면에 지도가 펼쳐졌다. 지중해 연안의 항구 도시. 세계 최대 도서관이 있던 곳. 당시 가장 국제적인 도시 중 하나.

김준영이 설명했다.

"알렉산드리아, 기원후 2-3세기. 이 도시는 당시 세계 최고의 지성이 모이는 곳이었어요. 유대교, 그리스 철학, 신흥 기독교가 충돌하고 융합하는 곳. 여기서 초대 교회의 가장 중요한 신학적 작업이 시작됩니다. 첫 번째 인물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입니다."

이요한이 손을 들었다. "교부들 중에서 왜 클레멘스부터 시작해요?"

서충성 목사가 답했다. "클레멘스가 처음으로 '그리스 철학의 영원 개념'과 '기독교의 영원 개념'을 본격적으로 비교하고 구별한 인물이기 때문이에요. 당시 기독교인들이 그리스 철학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고민할 때, 클레멘스는 이렇게 말했어요. '그리스 철학은 진리의 그림자다. 그리스도는 진리 자체다.'"

박양자 박사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잠깐만요. 그 말이 뭔 뜻이에요? 그림자라는 게 가짜라는 뜻이에요?"

"아니요," 서 목사가 말했다. "그림자는 실체가 있을 때 생기잖아요. 그리스 철학이 영원에 대해 뭔가 맞는 이야기를 했다는 것, 그런데 그 완전한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죠."

카림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슬람도 비슷한 말을 해요. 이전의 계시들, 유대교나 기독교의 가르침이 부분적 진리이고, 꾸란이 완전한 진리라고요."

이요한이 말했다. "그건 좀 다른 구조 아닌가요? 클레멘스는 그리스 철학이 계시라고 한 게 아니라, 인간 이성이 부분적으로 진리에 닿을 수 있다는 거잖아요."

"좋은 구분이네요," 서 목사가 말했다.

김준영이 정리했다. "자, 그럼 클레멘스가 영원에 대해 뭐라고 했는지 핵심만 보겠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어요: '영원하신 분은 시간의 바깥에 계신 것이 아니라, 시간의 *근거*이시다. 그리고 로고스이신 그리스도가 그 영원과 시간을 잇는 다리다.'"

화면에 도식이 나타났다.

[영원] ←— 로고스/그리스도 —→ [시간]

이윤혜가 눈을 반짝였다. "제 블로그에서 제가 영원을 두 가지로 나눴잖아요. '무한한 시간'이랑 '시간 초월'. 그런데 클레멘스는 그 둘 사이에 그리스도를 넣는 거네요?"

"정확해요," 서 목사가 말했다.

박양자 박사가 끼어들었다. "그런데 양자역학 관점에서 보면 이 구조가 재밌어요. 우리가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관찰자 효과'가 있거든요. 관찰되기 전까지는 가능성의 집합으로만 존재하다가, 관찰 순간에 하나의 현실로 '결정'됩니다. 영원한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 속으로 들어오신다는 건, 어떤 의미에서는 '가능성의 영원'이 '구체적 현실의 시간'으로 나타나는 사건과 비슷한 구조예요."

모두가 잠시 멈췄다.

카림이 말했다. "박사님, 지금 그거 신성모독이에요, 아니면 혁명적 통찰이에요?"

박양자가 웃었다. "몰라요. 그래서 물어보는 거예요."

서 목사가 신중하게 말했다. "비유로서는 흥미롭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가능성'으로만 계셨다는 뜻은 아니에요. 그분은 항상 완전하게 계십니다. 오히려 '가능성이 현실로 구체화된다'는 것보다, 영원한 완전함이 자발적으로 유한한 시간 안으로 내려오셨다, 는 게 더 정확합니다."

박양자가 노트에 받아 적었다.

이요한이 말했다. "그게 성육신(Incarnation)이죠?"

"맞습니다."

김준영이 다음으로 넘어갔다. "자, 이제 오리게네스로 가볼게요. 클레멘스의 제자격인 인물인데요. 이 사람이 좀 재미있어요. 천재인데, 좀 과했어요."

서충성 목사가 조심스럽게 웃었다. "네, 그렇게 표현할 수 있죠."

"오리게네스가 영원에 대해 한 말 중에 독창적인 것들이 있어요. 하나님의 영원성에 대한 통찰은 깊었는데, 그 통찰을 확장하다 보니 성경의 범위를 넘어가버린 거예요."

이윤혜가 물었다. "어떻게요?"

서 목사가 설명했다. "오리게네스는 영혼이 영원 전부터 선재(先在)했다고 봤어요. 그러니까 우리 영혼이 지금 여기 태어나기 전에 이미 하나님 앞에 영원히 있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만물이 결국 하나님에게로 돌아간다는 '아포카타스타시스', 즉 만물 회복설도 주장했어요."

카림이 말했다. "그게 왜 문제예요? 좋은 이야기 같은데요."

"왜냐하면," 이요한이 대답했다. "그렇게 되면 구원이 필요 없어져요. 어차피 다 돌아간다면, 예수님의 구원이 특별할 이유가 없잖아요."

"맞아요," 서 목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553년 콘스탄티노플 2차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됐습니다. 오리게네스는 영원에 대한 진짜 통찰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걸 플라톤 철학의 틀로 너무 확장하다 보니 성경의 핵심인 '역사적 구원'이 희미해진 거예요."

김준영이 요약했다. "클레멘스 = 그리스 철학을 적절히 활용, 오리게네스 = 과하게 활용. 그게 오늘의 첫 번째 교훈이에요. 도구가 좋다고 해서 무한정 사용하면 안 된다."

이윤혜가 말했다. "제 블로그도 그 문제가 있었던 것 같아요. 불교·힌두교·기독교를 같은 레벨에 놓고 비교했는데, 기독교 입장에서는 그게 좀... 맥락을 지워버린 게 됐던 거군요."

"그렇습니다," 서 목사가 따뜻하게 말했다. "비교하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아요. 하지만 비교할 때 각 종교의 핵심 주장이 존중되어야 해요. 기독교의 핵심 주장은 영원하신 분이 역사 속에 *직접 개입하셨다*는 것이거든요. 그게 빠지면 기독교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되는 거예요."

최서인 편집장이 태블릿에 뭔가를 메모하며 중얼거렸다. "1장 제목은 '도구의 유혹'이 좋겠어."

박양자 박사가 옆에서 들으며 물었다. "무슨 책 쓰세요?"

"아직 몰라요. 오늘 내용 들으면서 결정할 거예요."

웃음이 터졌다.

제3장 — 히포의 불빛 (아우구스티누스, 그리고 시간 문제)

[자막: 기원후 354-430년, 북아프리카 히포 레기우스]

김준영이 화면을 가리켰다. 사막의 항구 도시 그림. 저 멀리 붉은 화염이 보였다.

"이번엔 아우구스티누스로 넘어갑니다. 여기 계신 분들 아우구스티누스 아세요?"

카림이 손을 들었다. "레바논 가톨릭 학교 다녔어요. 고백록 1학년 때 읽었습니다."

이윤혜가 손을 들었다. "저도요. '우리 마음은 당신 안에 쉬기까지 쉬지 못합니다' — 이 구절은 알아요."

"딩동댕," 김준영이 말했다. "그게 핵심이에요. 오늘 영원에 대한 이야기에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중요한 이유가 딱 세 가지예요."

서충성 목사가 화이트보드에 적었다.

1. 시간은 피조물이다
2. 영원한 현재 (nunc stans)
3. 인간의 불안과 영원의 관계

"먼저 첫 번째부터." 서 목사가 말했다. "아우구스티누스 이전에는 사람들이 이런 질문을 했어요. '하나님이 창조 이전에 뭘 하고 계셨나요?' 그 질문에 아우구스티누스가 뭐라고 답했냐면..."

이요한이 웃으며 말했다. "'창조 이전'이라는 말 자체가 불가능해요. 시간도 창조의 일부이기 때문에."

"정확합니다," 서 목사가 말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11권을 보면, 이 질문에 이렇게 답해요. 시간은 창조와 함께 시작됐다. 창조 '이전'이란 없다. 왜냐면 '이전'이라는 단어 자체가 시간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박양자 박사가 눈이 커졌다. "그게 현대 우주론이랑 일치하는데요?"

"어떻게요?"

"빅뱅 이론에서도 '빅뱅 이전'은 없어요. 시간과 공간 자체가 빅뱅과 함께 시작됐거든요. 호킹도 그 질문에 '빅뱅 이전은 없다, 마치 북극점보다 더 북쪽이 없듯이'라고 답했어요."

카림이 말했다. "그러니까 5세기의 신학자랑 20세기의 물리학자가 같은 결론에 도달한 거네요. 방법은 달리."

"그게 흥미로운 점이에요," 서 목사가 말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성경과 철학적 사유로, 호킹은 물리 방정식으로."

이윤혜가 메모하며 말했다. "제 블로그에서 과학 파트에 이걸 넣었어야 했는데..."

"넣어도 됐어요," 서 목사가 웃었다. "하지만 그걸 넣었다면 아마 '신학생'들이 아니라 '과학자'들한테 댓글 폭격을 받으셨겠죠."

두 번째, 영원한 현재 (nunc stans).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 11권에서 한 가장 유명한 분석이 있어요. '시간이란 무엇인가?' 그가 말한 내용을 요약하면 이래요. 우리가 '현재'라고 부르는 것은 실은 존재하지 않아요.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안 왔고, 현재는 찰나에 지나지 않죠. 인간은 항상 기억(과거)과 기대(미래) 사이에서 살아요."

김준영이 끼어들었다. "그거 좀 우울한 이야기인데요."

"맞아요," 서 목사가 웃었다. "그런데 여기서 반전이 있어요. 하나님에게는 이 문제가 없다는 거죠. 하나님에게는 모든 시간이 영원한 현재 안에 있어요. 라틴어로 nunc stans, 서 있는 지금. 하나님의 지금은 흘러가지 않아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하나님의 눈앞에는 지금 동시에 완전히 있는 거예요."

박양자 박사가 손을 들었다. "그게 양자역학의 '중첩 상태'랑 다른 거죠? 뭔가 비슷한 것 같으면서."

"뭐가 비슷한 것 같아요?"

"양자 입자는 관측 전에 여러 상태가 동시에 존재해요. 그런데 하나님의 경우는... 동시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동시에 '아신다'는 건가요?"

서 목사가 신중히 말했다. "좋은 구분이에요. 하나님은 과거·현재·미래가 동시에 불확정한 게 아니에요. 그분은 모든 것을 완전히, 확정적으로, 동시에 아세요. 그게 영원한 지식이에요."

이요한이 말했다. "그러면 그게 인간의 자유의지랑 충돌하지 않나요? 하나님이 내 미래를 이미 아신다면, 내가 선택의 자유가 있는 건가요?"

서 목사가 잠시 멈췄다. "그게 아우구스티누스도 씨름한 문제예요. 그의 답은: 하나님이 아신다는 것과, 내가 자유롭게 선택한다는 것은 서로 모순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당신이 a를 선택할 것을 안다'는 것은, 당신이 강제로 a를 선택하게 된다는 뜻이 아니에요. 당신이 자유롭게 a를 선택할 것을, 하나님이 미리 아신다는 거예요."

카림이 말했다. "이슬람의 카다르(운명) 논쟁이랑 똑같은 문제예요. 이슬람 신학자들도 수백 년 동안 이것 때문에 싸웠어요. '알라가 모든 것을 알고 정했다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뭐냐.'"

"그 문제는 오늘 다 풀기 어렵습니다," 김준영이 웃으며 개입했다. "대신 아우구스티누스의 세 번째 핵심으로 넘어가죠. 인간의 불안과 영원의 관계."

서 목사가 말했다. "고백록의 첫 줄을 다시 봐요. '우리 마음은 당신 안에서 쉬기까지 쉬지 못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 인생을 돌아보면서 이렇게 말해요. 나는 쾌락에서 안식을 찾았고, 명예에서 찾았고, 철학에서 찾았고, 매니교에서 찾았다. 그런데 진짜 안식은 하나님 안에 있었다고."

이윤혜가 조용히 말했다. "저도 그랬어요. 영원에 대한 질문을 찾아다니면서, 철학책도 보고 불교 공부도 하고 요가도 해봤는데... 뭔가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느낌이 있었어요."

잠깐 침묵이 흘렀다.

최서인 편집장이 조용히 말했다. "그게 책이 팔리는 이유예요. 사람들이 그 '채워지지 않는 느낌' 때문에 계속 책을 사거든요."

웃음이 다시 터졌지만, 이번에는 조금 더 씁쓸했다.

서충성 목사가 말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핵심 통찰은 이거예요. 인간이 영원을 그리워하는 것 자체가, 우리가 영원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증거다. 어떤 동물도 영원을 고민하지 않아요. 인간만이 '나는 왜 죽어야 하는가', '이 너머에 무언가 있는가'를 물어요. 그 질문 자체가, 우리 안에 영원의 흔적이 있다는 거예요."

박양자 박사가 말했다. "그건 진화심리학으로 설명할 수도 있어요. 인간이 미래를 예측하고 과거를 기억하는 능력이 극도로 발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시간이 끝나지 않는다면 어떨까'를 상상하게 된 거라는 거죠."

"그게 틀린 설명은 아니에요," 서 목사가 말했다. "하지만 그 설명은 '왜 영원을 그리워하는가'에 답하지, '영원이 실재하는가'에는 답 못 해요."

"맞아요." 박양자 박사가 솔직히 인정했다. "그건 과학의 한계예요."

김준영이 정리했다. "오늘 아우구스티누스 편 요약. 첫째, 시간은 창조의 일부다. 둘째, 하나님은 시간이 아닌 영원 안에 계신다 — nunc stans. 셋째, 인간의 불안과 그리움이 사실은 영원을 향한 나침반이다. 이 세 가지가 아우구스티누스의 선물입니다."

이요한이 말했다. "그리고 그게 그냥 철학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체적 인격 안에서 의미를 갖는다는 것도요."

서 목사가 미소 지었다. "그게 바로 핵심이에요."

제4장 — 감옥에서 쓴 영원의 정의 (보에티우스)

[자막: 기원후 524년, 이탈리아 파비아의 감옥]

김준영이 목소리를 낮췄다.

"이번 인물은 분위기가 좀 달라요. 보에티우스. 이 사람 이름 들어보신 분 있어요?"

박양자 박사만 손을 들었다.

"역시 박사님만." 김준영이 웃었다. "일반인한테는 좀 낯설죠. 근데 이 사람이 역사상 영원에 대해 가장 정확한 정의를 내린 사람이에요. 그것도 사형 집행을 기다리면서."

카림이 진지해졌다. "무슨 일이 있었어요?"

"보에티우스는 동로마 제국의 귀족이자 최고 관리였어요. 학자이기도 했고요. 그런데 정치적 음모에 휘말려서 반역죄로 몰렸어요. 재산 다 압수당하고, 감옥에 갇혀서 처형을 기다리게 됩니다."

이윤혜가 말했다. "그 상황에서 글을 썼어요?"

"네. 그래서 나온 책이 「철학의 위안」입니다. 라틴어로 Consolatio Philosophiae. 그 책에 이 문장이 나와요."

서충성 목사가 화이트보드에 라틴어를 썼다.

*aeternitas est interminabilis vitae tota simul et perfecta possessio*

"영어로 번역하면: Eternity is the complete, simultaneous, and perfect possession of unlimited life. 한국어로: 영원이란 제한 없는 생명의, 완전하고 동시적이며 완벽한 소유이다."

박양자 박사가 말했다. "Tota, Simul, Perfecta. 전체, 동시에, 완전하게."

"딱 맞게 외우셨네요."

"논문에서 인용한 적 있어요."

이요한이 물었다. "이 정의가 왜 그렇게 중요해요?"

서 목사가 설명했다. "세 단어가 각각 하나씩 인간의 시간 경험을 반박해요. 우리 인간의 시간은 Tota가 아니에요. 부분적이에요. 어제를 기억하고, 내일을 기대하지만, 동시에 가지진 못해요. 우리의 시간은 Simul이 아니에요. 순차적이에요. 어제가 가야 오늘이 와요. 우리의 시간은 Perfecta가 아니에요. 항상 뭔가 빠져 있어요.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불완전해요."

"그런데 하나님의 영원은?"

"전체이고, 동시적이고, 완전해요. 모든 것이 지금 완전하게 있어요."

카림이 손을 들었다. "그럼 하나님은 지루하지 않나요? 다 알면 뭐가 재미있어요?"

방이 잠시 조용해졌다.

최서인 편집장이 웃으며 말했다. "그 질문 구독자들 좋아하겠다."

서 목사가 웃으며 답했다. "그 질문이 사실 신학적으로 의미 있어요. 우리가 '지루하다'고 느끼는 건 시간이 있기 때문이에요. 기다림이 있고, 예측이 있고, 결과가 다를 때 실망하거나 기뻐하죠. 하나님에게 그런 방식의 '지루함'은 없어요. 하지만 그분이 기쁨이 없다는 뜻은 아니에요. 오히려 성경은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말해요. 다만 그 기쁨은 우리 방식의 기쁨이 아닐 거예요."

이요한이 말했다. "마치 우리가 한 음씩 순서대로 듣는 음악을, 하나님은 전체 교향곡을 한 번에 듣는 것과 비슷한 건 아닐까요? 그분이 각 음을 모른다는 게 아니라, 전체를 동시에 아신다는."

서 목사가 눈을 반짝였다. "훌륭한 비유네요."

박양자 박사가 말했다. "그 비유가 양자역학의 힐베르트 공간이랑 비슷한데요. 고전 물리학에서는 입자가 하나씩 순서대로 위치를 갖지만, 힐베르트 공간에서는 모든 가능한 상태가 동시에 수학적으로 표현돼요. 물론 하나님과 힐베르트 공간을 동일시하면 안 되지만."

카림이 말했다. "오늘 박사님은 계속 '비슷하지만 같지는 않다'고 하시는데, 솔직히 얼마나 비슷해요?"

박양자가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비유로는 상당히 비슷해요. 하지만 비유는 비유예요. 수학적 공간과 신학적 신은 같은 게 아니에요. 다만... 우주를 탐구하다 보면 우주 자체가 굉장히 이상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게 느껴져요. 그 이상함이 저를 어떤 경계까지 데려가는데, 거기서부터는 제 언어가 없어요."

이윤혜가 조용히 말했다. "저도 그 경계를 느꼈어요. 그래서 블로그를 썼던 것 같아요."

"그 경계에서 어떤 분들은 멈추고," 서 목사가 말했다. "어떤 분들은 계속 걸어 들어가요. 신앙은 그 경계를 넘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증명이 끝나고 신뢰가 시작되는 지점."

김준영이 감탄했다. "서 목사님 오늘 명언 제조기네요."

이제 다시 보에티우스로.

"이 사람이 감옥에서 이 글을 쓴 게 중요해요," 서 목사가 말했다. "추상적인 서재에서 쓴 게 아니에요. 죽음을 기다리면서, 아내와 아이들이 어떻게 됐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재산도 다 빼앗긴 상황에서 썼어요. 그런데 그 상황에서 그가 찾아낸 위로가 뭔지 알아요? '영원하신 분의 눈앞에 내 삶 전체는 지금도 완전히 있다'는 거예요."

이윤혜가 눈이 촉촉해졌다.

"잃어버린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영원한 시간의 관점에서는 사라지지 않았다는 거죠," 서 목사가 계속했다. "죽음이 시간의 마침표라면, 영원은 그 마침표 너머에 있어요."

카림이 말했다. "이게 제가 전쟁 지역 취재할 때 만난 신앙인들이랑 비슷해요. 레바논 내전을 겪은 어르신들이 있는데, 모든 걸 잃었는데도 평안한 분들이 있었거든요. 그분들한테 물어보면 비슷한 말을 해요. '내가 잃은 것들이 사라진 게 아니다.' 그게 신앙의 힘인지, 심리적 자기보호 기제인지는 몰라도."

서 목사가 말했다. "둘 다일 수 있어요. 신앙이 심리적 회복력을 주는 것은 사실이에요. 그런데 그걸로 신앙을 환원하는 건 무리예요. 마치 사랑이 신경전달물질의 작용이라고 해서 사랑이 가짜라고 할 수는 없는 것처럼."

박양자 박사가 말했다. "그게 제가 과학과 신앙의 관계에서 항상 막히는 지점이에요. 과학은 '어떻게'를 설명하는데, 신앙은 '왜'와 '무엇을 위해'를 다루는 것 같아요."

"정확합니다," 서 목사가 말했다.

김준영이 정리했다. "보에티우스 요약. 감옥에서 쓴 영원의 정의 — Tota, Simul, Perfecta. 전체적으로, 동시에, 완전하게. 그리고 그 영원이 죽음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위로의 근거다."

제5장 — 스콜라의 두 거장 (안셀무스와 아퀴나스)

[자막: 11세기 캔터베리 & 13세기 파리]

"이제 중세 스콜라 신학자들 차례입니다," 김준영이 말했다. "두 명 나옵니다. 안셀무스와 토마스 아퀴나스. 이름만 들어도 무거운 느낌이 들죠?"

이요한이 웃으며 말했다. "신학생한테는 그냥 시험 문제예요."

"좋습니다. 그럼 이요한 학생이 설명해주세요. 이 두 분이 영원에 대해 뭐라고 했는지."

이요한이 약간 긴장했지만 답했다.

"안셀무스는 존재론적 논증으로 유명해요. '하나님은 그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존재'라는 정의에서 출발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증명하려 했어요. 이게 영원이랑 어떻게 연결되냐면 — 만약 하나님이 시간에 종속된다면, 그분보다 더 큰 존재인 '시간을 초월한 존재'를 상상할 수 있게 되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이 가장 큰 존재가 아닌 게 돼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논리적으로 반드시 시간을 초월해야 해요."

카림이 말했다. "그 논증은 이슬람 철학에도 비슷한 게 있어요. 이븐 시나, 이른바 아비센나가 비슷한 논증을 했죠."

서 목사가 말했다. "맞아요. 당시 이슬람 철학자들과 유럽 기독교 신학자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어요. 아퀴나스도 이븐 루시드, 즉 아베로에스의 아리스토텔레스 주석을 많이 참고했고요."

박양자 박사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니까 중세에 기독교·이슬람·유대교가 학문적으로 교류했다는 거네요?"

"당연하죠," 카림이 말했다. "특히 이슬람 황금기에 아랍 학자들이 그리스 철학을 아랍어로 번역하고 발전시켰는데, 그게 나중에 유럽으로 역수입됐어요. 아리스토텔레스가 서유럽에서 재발견된 게 아랍어 번역본을 통해서예요."

이윤혜가 말했다. "그게 제 블로그에서 '철학에서의 영원' 파트를 썼을 때 느낀 거예요. 이 개념들이 서로 연결돼 있더라고요."

김준영이 다음으로 넘어갔다. "자, 아퀴나스. 토마스 아퀴나스가 영원에 대해 한 가장 중요한 논증은 뭐예요?"

서충성 목사가 설명했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을 가져와서 이렇게 말해요. 시간은 운동의 수, numerus motus, 즉 변화를 측정한 것이다. 변화가 있는 곳에 시간이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순수 현실태, actus purus이시다. 어떤 가능성도, 어떤 변화도 없이 완전히 실현된 존재이시다. 변화 없는 곳에 시간도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영원하다."

박양자 박사가 손을 들었다. "그런데 아퀴나스의 하나님이 '변화가 없다'면, 기도가 의미가 있나요?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신다면 변화한 거 아닌가요?"

"오, 좋은 질문," 서 목사가 말했다. "그게 아퀴나스가 씨름한 문제예요. 그의 답은 이래요. 하나님이 변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은 영원 안에서 이미 기도와 응답을 동시에 아신다. 우리 시간 안에서는 기도가 먼저이고 응답이 나중인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영원 안에서는 동시에 있는 일이다."

카림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반응하시는 건 아닌 거 아닌가요? 그냥 미리 다 정해진 것 같은데요."

서 목사가 말했다. "그게 아퀴나스에 대한 비판 중 하나예요. 나중에 바르트가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공격해요. 아퀴나스의 하나님이 너무 '정적'이고, 성경의 하나님은 더 역동적이라고."

이요한이 말했다. "저도 솔직히 아퀴나스 읽을 때 '이분이 설명하는 하나님이 성경의 하나님이랑 같은 분인가?' 하는 느낌이 들 때가 있었어요. 너무 철학적이어서."

"그 느낌이 중요해요," 서 목사가 말했다. "아퀴나스가 틀렸다는 게 아니라, 언어의 한계예요. 하나님을 논리로만 잡으면, 어느 순간 살아계신 분이 개념이 돼버려요. 아퀴나스도 인생 말년에 '내가 쓴 것들이 지푸라기 같다'고 했을 정도로 자신의 신학적 언어의 한계를 느꼈어요."

최서인 편집장이 말했다. "대단한 사람이다. 자기가 쓴 엄청난 저작들을 지푸라기라고 하다니."

"그건," 이윤혜가 말했다. "하나님을 더 직접 경험했기 때문에 그런 거 아닐까요? 글보다 더 실재하는 무언가를."

잠깐 침묵이 흘렀다.

박양자 박사가 조용히 말했다. "그런 경험 있어요? 직접 하나님을 경험했다는 느낌."

이요한이 말했다. "저는 있어요."

카림이 말했다. "저도 있어요. 종교는 없는데."

서 목사가 말했다. "그 경험에 대해 신학은 설명을 시도하지만, 설명이 경험을 대체할 수는 없어요. 아퀴나스의 '지푸라기' 발언이 바로 그 이야기예요."

김준영이 잠시 말을 멈추다가 카메라를 향해 말했다.

"잠깐 광고 없이 계속 가겠습니다."

제6장 — 제네바의 설교자 (칼뱅, 그리고 시편 90편 다시 읽기)

[자막: 16세기 제네바]

"이제 종교개혁 시대로 왔습니다," 김준영이 말했다. "장 칼뱅. 한국 개신교에서 굉장히 영향력 있는 신학자예요. 칼뱅의 영원 개념에서 뭐가 새로운지 서 목사님이 설명해주세요."

서충성 목사가 시편 90편을 펼쳤다.

"칼뱅의 가장 중요한 기여는 영원 개념을 다시 성경의 맥락으로 가져온 거예요. 아퀴나스가 철학적으로 설명했다면, 칼뱅은 성경, 특히 시편으로 돌아가요. 그리고 이렇게 말해요. 시편 90편은 단순히 하나님의 영원성에 대한 철학적 진술이 아니다. 이건 기도다."

이윤혜가 눈을 반짝였다. "아, 저 그 시편 인용했는데."

"네, 2절 인용하셨죠.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선생님은 이것을 '하나님이 창조 이전부터 계셨다'는 의미로 해석하셨는데요, 그게 틀린 건 아니에요."

"그런데요?"

"그런데 칼뱅이 보는 이 시편의 핵심은 그게 아니에요. 1절을 봐야 해요.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시편 90편은 하나님의 영원성과 인간의 덧없음을 대조하는 시편이에요. 우리는 잠깐 사는 존재고, 하나님은 영원히 계신 분이에요. 근데 그 차이가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게 아니라, 위로가 된다는 거예요. 왜냐면 영원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거처', 즉 집이 되어주시기 때문이에요."

이요한이 말했다. "영원이 공포가 아니라 피난처."

"맞아요," 서 목사가 말했다. "칼뱅은 이걸 강조해요. 우리가 죽을 존재라는 게 두려운 이유는 혼자이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영원하신 분이 우리의 집이 되어주신다면, 우리의 덧없음은 오히려 그분 안에 더 깊이 들어가는 통로가 될 수 있어요."

박양자 박사가 천천히 말했다. "그게 실존적으로 어떻게 가능하죠? 그냥 위로의 말이 아니에요?"

서 목사가 말했다. "칼뱅의 대답은 이래요.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시간 안에 태어나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요. 그분이 영원과 시간의 연결고리가 되셨기 때문에, 시간 안에 사는 우리가 그분을 통해 영원에 참여할 수 있다고요."

카림이 말했다. "그게 바로 기독교의 독특함이에요. 이슬람도 하나님의 영원성을 믿어요. 유대교도요.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역사 속에 태어났다는 건 기독교 만의 주장이에요."

"그 주장이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김준영이 카림에게 물었다.

카림이 잠시 생각했다. "논리적으로는 불가능해 보여요. 무한한 존재가 유한한 육신을 가진다는 게. 이슬람이 이걸 거부하는 이유예요. 하나님은 유한한 것과 섞일 수 없다는 거죠. 그런데 동시에,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엄청난 이야기잖아요. 무한이 유한 안으로 들어왔다는."

이요한이 말했다. "그게 저한테 믿음의 도약이 됐어요. 논리로는 이해 안 되는데, 이해 안 되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오신 것 자체가 오히려 그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증거 같았어요. 인간이 설계한 방식으로 오셨다면, 그건 인간의 종교일 거예요."

최서인 편집장이 조용히 말했다. "그 말은 책에 꼭 써야 해요."

이윤혜가 말했다. "저는 그 도약이 아직 무서워요. 확실하지 않으니까."

"무서운 게 당연해요," 서 목사가 말했다. "믿음은 증거 위에서만 서는 게 아니에요. 하지만 믿음은 무지에서 오는 것도 아니에요. 칼뱅이 말하는 믿음은, 하나님이 충분히 알 수 있도록 자신을 계시해주셨고, 우리가 그 계시를 신뢰하는 거예요. 아직 보지 못한 것에 대한 신뢰."

박양자 박사가 말했다. "과학에도 그런 게 있어요. 아직 직접 관측하지 못한 것들을 이론으로 예측하고, 그 예측을 신뢰해서 실험을 설계해요. 그게 맞아떨어질 때 기쁨이 있죠. 신앙이 그 구조랑 비슷한 거라면 이해가 돼요."

서 목사가 말했다. "훌륭한 비유예요. 믿음은 맹목적 확신이 아니라, 근거 있는 신뢰입니다."

제7장 — 변증법의 폭풍 (칼 바르트, 영원의 재발견)

[자막: 20세기 스위스 바젤]

"자, 이제 20세기로 점프합니다," 김준영이 말했다. "칼 바르트. 20세기 가장 위대한 신학자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인물이에요. 이 사람이 영원에 대한 전통적 신학을 어떻게 뒤흔들었는지 볼게요."

서충성 목사가 말했다. "바르트의 핵심 문제 제기는 이거예요. 아우구스티누스부터 아퀴나스까지 이어진 전통에서 영원은 주로 '무시간성(timelessness)'으로 이해됐어요. 하나님은 시간이 없는 분이다. 그런데 바르트가 물어요. 그러면 성경의 이야기는 뭐냐? 성경은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행동하시는 이야기잖아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고,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예수님으로 오시고."

이요한이 말했다. "시간 없는 분이 왜 시간 속에서 행동하세요?"

"바로 그게 바르트의 질문이에요," 서 목사가 말했다. "그래서 바르트는 영원을 다시 정의해요. 하나님의 영원은 단순히 '시간이 없음'이 아니라, '시간의 주인됨'이에요. 하나님은 시간이 없어서 초월하신 게 아니라, 시간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고, 시간 안으로 들어오실 수 있는 분이라는 거예요."

박양자 박사가 말했다. "그게 뭐가 달라요? 미묘한 차이인 것 같은데."

"크게 달라요," 서 목사가 말했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영원을 세 가지로 나눠요. 전(前)시간성, 공(共)시간성, 후(後)시간성. 창조 이전에 계신 하나님, 역사 안에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종말에 완성하실 하나님. 이 세 가지가 다 하나님의 영원 안에 있어요."

화이트보드에 도식을 그렸다.

[전시간성] — [공시간성: 성육신] — [후시간성: 종말]
←——— 하나님의 영원 ———→

카림이 말했다. "그러면 성육신이 영원의 중심에 있네요."

"맞아요," 서 목사가 말했다. "바르트에게 영원에 대한 진정한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예요.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으면, 예수를 봐야 한다는 거죠. 그래서 바르트의 신학을 '기독론적 집중'이라고 불러요. 모든 신학적 질문의 답이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모여요."

이윤혜가 말했다. "그게 처음에 말씀하신 '영원이 인격이다'라는 것과 연결되네요."

"정확해요," 서 목사가 웃었다. "선생님 이해력이 뛰어나시네요."

이윤혜가 빨개졌다.

"근데," 최서인 편집장이 말했다. "바르트의 신학을 읽어봤는데요. 교회교의학이 13권이잖아요. 저 평생 못 읽겠더라고요."

웃음이 터졌다.

"맞아요," 이요한이 말했다. "신학생들한테도 바르트 전집은 산이에요."

서 목사가 말했다. "바르트 자신도 자기 신학을 요약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이렇게 말했대요.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한 성경에 있네.' 그게 전부라고요."

잠깐 침묵이 흘렀다.

박양자 박사가 조용히 말했다. "그 단순함이 오히려 더 어려운 것 같아요."

"왜요?"

"어린이 찬송 한 줄을 진짜로 믿는 게, 교의학 13권 이해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 같아서요."

이요한이 말했다. "동의해요. 저도 신학 공부하면서 가끔 지식이 믿음을 방해하는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뭔가 많이 알수록 단순히 신뢰하기가 어려워지는 것 같아서."

서 목사가 말했다. "그게 지식의 역설이에요. 지식은 신앙의 적이 아니에요. 하지만 지식이 신앙의 대체물이 될 때 위험해요. 바르트가 신학을 공부하면서도 항상 강조한 게 그거예요. 신학은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학문이지만, 결국 하나님 앞에서는 침묵이 가장 정직한 언어일 수도 있다고."

카림이 말했다. "이슬람에서는 '알라후 아크바르', 하나님은 더 크시다, 를 항상 말해요. 어떤 인간의 언어도 하나님을 다 담을 수 없다는 뜻이에요. 그 겸손함이 세 종교에 공통으로 있는 것 같아요."

"맞아요," 서 목사가 말했다. "그 겸손이 신학의 출발점이기도 하고, 도착점이기도 해요."

제8장 — 수용소 철조망 앞의 신학 (몰트만, 고난과 영원)

[자막: 2차 세계대전 포로수용소, 1945]

방이 조용해졌다. 화면에 흑백 사진이 하나 나타났다. 철조망. 수용소.

김준영이 천천히 말했다.

"위르겐 몰트만. 독일 신학자. 1926년생. 17세 때 2차 세계대전에 징집됐어요. 친구들이 자기 눈앞에서 죽는 걸 봤고, 포로가 돼서 영국 수용소에 몇 년간 있었어요. 그 경험이 그의 신학의 출발점이에요."

카림이 조용히 말했다. "그런 사람이 쓴 신학은 달라요."

"맞아요," 서충성 목사가 말했다. "몰트만의 첫 번째 질문은 이거예요. 하나님이 영원하시고 전능하시다면, 아우슈비츠는 왜 있었는가? 드레스덴은? 히로시마는? 그 고통 속에서 하나님은 어디 계셨는가?"

이윤혜가 말했다. "그게 제가 코로나 때 힘들었을 때 했던 질문이기도 해요. 규모는 비교도 안 되지만."

"규모가 달라도 질문은 같아요," 서 목사가 말했다. "그게 인간이 고통 속에서 가장 먼저 묻는 질문이에요. 왜."

박양자 박사가 말했다. "과학자 입장에서는 '왜'라는 질문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에요. 과학은 '어떻게'를 설명하는 거지, '왜'를 설명하는 게 아니거든요. 고통의 메커니즘은 설명할 수 있어요. 신경학적으로, 생물학적으로. 하지만 고통이 왜 있어야 하는지는 과학의 영역 밖이에요."

이요한이 말했다. "그래서 신학이 필요한 거죠."

"몰트만의 답이 뭔지 아세요?" 서 목사가 말했다.

"말씀해주세요."

"하나님은 고통 밖에서 고통을 관망하신 게 아니에요.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고통을 *함께* 당하셨어요. 성자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성부 하나님도 거기 계셨어요. 그게 몰트만의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이에요."

카림이 말했다. "그게 이슬람에서 받아들이기 제일 어려운 부분이에요. 알라가 고통을 당할 수 없다는 거거든요. 그분은 완전하고 절대적이기 때문에."

"맞아요," 서 목사가 말했다. "그리고 전통 기독교 신학에서도 '하나님은 감정이 없으시다(apatheia)'는 개념이 있었어요. 아퀴나스도 그쪽이었고요. 몰트만은 그 개념에 정면으로 도전해요. 고통받을 수 없는 하나님은 아우슈비츠의 피해자들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고요."

이윤혜가 조용히 말했다. "그 말이 오히려 더 와닿아요. 고통 밖에 계신 전능한 신보다, 고통 안에 함께 계신 분이 더..."

"실재하는 것처럼 느껴지죠," 박양자 박사가 말을 받았다.

"그리고," 서 목사가 계속했다. "몰트만이 영원에 대해 가장 혁명적으로 기여한 것은 '부활의 신학'이에요. 부활은 단순히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부활은 영원한 생명이 역사 안으로 침투한 사건이에요. 그것도 가장 처참하고 낮은 자리인 처형장에서."

이요한이 말했다. "죽음이 마지막이 아님이 증명됐다는 거죠."

"맞아요. 그래서 몰트만은 말해요. 희망은 비현실적 꿈이 아니다. 희망은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근거한 현실적 기대다. 영원한 생명이 이미 시간 안에 나타났다. 그리고 그 영원은 역사의 끝에서 완성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하는 모든 것 — 정의를 위한 싸움, 사랑의 실천, 돌봄과 연대 — 이 모두 영원 안에 보존되고 완성될 것이다."

최서인 편집장이 펜을 내려놓았다.

"방금 제 인생 관점이 바뀐 것 같은데요."

모두가 잠시 말이 없었다.

박양자 박사가 조용히 말했다. "저는 신앙이 없는데, 몰트만의 논리가 지금까지 나온 것 중에 제일 설득력 있어요.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카림이 말했다. "왜냐하면 실제 고통을 통과한 사람의 이야기니까요. 수용소에서 나온 사람의 언어와 서재에서 쓴 언어는 달라요."

이윤혜가 말했다. "그래서 신학이 살아있는 거구나요."

서 목사가 말했다. "그래서 신앙도 살아있어요. 개념이 아니라 경험 안에서."

제9장 — 예언자적 상상력 (브루그만, 영원은 지금 여기서 시작된다)

[자막: 21세기 미국 컬럼비아 신학대학원]

"자, 마지막 신학자입니다," 김준영이 말했다. "월터 브루그만. 살아있는 구약학자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에요. 나이가 아흔 넘었는데 지금도 글 써요. 어마어마한 분이죠."

서충성 목사가 말했다. "브루그만이 영원에 대해 직접적으로 쓴 건 아니지만, 시편 90편에 대한 그의 주석이 영원 개념을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해요."

"어떻게요?"

"브루그만은 성경 텍스트를 항상 사회·역사적 맥락에서 봐요. 시편 90편, 그러니까 선생님 블로그가 인용한 그 시편을 브루그만은 이렇게 읽어요. 이 시편은 언약 공동체, 즉 이스라엘 백성이 역사의 폭력과 혼돈 앞에서 하나님의 영원성에 호소하는 기도다."

이윤혜가 말했다. "그게 단순히 '하나님이 영원하다'를 선언하는 것과 달라요?"

"많이 달라요. 브루그만에게 영원은 철학적 속성이 아니에요. 영원은 언약적 관계예요. 하나님이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신다는 건, 그분의 언약이 영원히 신실하다는 거예요. 아브라함과 맺으신 약속이, 다윗과 맺으신 언약이, 예레미야가 선포한 새 언약이 — 다 영원 안에서 신실하게 유지된다는 거예요."

카림이 말했다. "그게 개인의 신앙뿐만 아니라 역사적 약속이기도 하네요."

"맞아요," 서 목사가 말했다. "브루그만이 강조하는 게 그거예요. 영원을 개인적 위로의 언어로만 쓰면 너무 좁아져요. 영원하신 하나님이 역사 안에서 정의와 샬롬을 이루어가신다는 것, 그 역사적 약속도 영원의 내용에 포함된다고요."

이요한이 말했다. "그래서 브루그만이 예언자적 상상력을 강조하는군요."

"그렇습니다. 브루그만의 유명한 개념이 예언자적 상상력이에요. 예언자는 현재의 현실에 갇히지 않고, 하나님의 미래를 상상한다는 거예요. 영원한 하나님의 뜻이 어떠한지를 상상하고, 그 상상으로 현재를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예언자의 역할이에요."

박양자 박사가 말했다. "그러면 영원이 지금 여기서 실천되는 거네요? 추상적인 저 너머의 세계가 아니라."

"정확해요," 서 목사가 말했다. "브루그만은 말해요. 영원에 대한 진정한 인식은 우리를 현재에서 도피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현재에 더 깊이 참여하게 만든다. 왜냐면 영원한 하나님의 뜻이 지금 여기서 실현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윤혜가 말했다. "제 블로그에서 '인간은 왜 영원에 대해 생각하는가' 파트가 있었는데, 브루그만의 말이 그 질문에 답이 되는 것 같아요."

"어떻게요?"

"우리가 영원을 생각하는 건, 현재가 완전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불의가 있고, 죽음이 있고, 사랑이 끊기는 경험이 있어요. 영원에 대한 그리움은 그 불완전함에 대한 저항인 것 같아요."

서 목사가 감동받은 표정으로 말했다. "선생님, 그게 바로 브루그만의 핵심이에요. 영원은 현재 세계의 불완전함에 대한 저항의 언어이기도 하다는 거요."

카림이 말했다. "저는 중동에서 전쟁 취재를 많이 했어요. 가자, 시리아, 레바논. 거기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많이 봤는데, 그들이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버티기 어려운 상황들이에요. 그런데 영원이 있다는 믿음, 하나님의 공의가 결국 이긴다는 믿음이 그들을 지탱하더라고요."

이요한이 말했다. "그게 신앙이 가진 힘이에요. 도피가 아니라 저항."

"그 단어가 정확해요," 서 목사가 말했다. "브루그만은 신앙을 도피 수단으로 쓰는 것에 강하게 반대해요. 영원한 하나님이 정의의 하나님이시라면, 그분을 믿는 사람들은 지금 여기서 정의를 위해 싸워야 한다고요. 영원은 현재 포기의 이유가 아니라, 현재 참여의 이유예요."

최서인 편집장이 말했다. "그 말이 제가 오늘 들은 것 중에 제일 실용적이에요."

김준영이 웃었다. "편집장님한테 '실용적이다'는 게 최고의 칭찬이죠."

"맞아요," 최서인이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이건 진짜 칭찬이에요. 오늘 토론 들으면서 처음에는 '영원'이 너무 추상적인 주제 같았는데, 몰트만이랑 브루그만 파트에서 갑자기 지금 내 삶이랑 연결되는 느낌이 들었어요."

제10장 — 양자역학과 영원 (박양자 박사의 고백)

광고 없이 계속됩니다. 자막이 뜨고, 조명이 약간 달라졌다.

"자," 김준영이 말했다. "지금까지 신학자들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박양자 박사님이 계속 흥미롭게 들으시면서 뭔가 연결 지으시는 것 같았어요. 박사님 파트를 따로 드리고 싶어요. 양자역학과 영원, 어떻게 연결되나요?"

박양자 박사가 노트를 정리하며 말했다.

"먼저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저는 양자역학으로 하나님을 증명하거나 반증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 시도들이 많이 있는데, 대부분 과학적으로도 신학적으로도 부실해요."

"그런데요?"

"그런데 양자역학을 공부하다 보면 우주가 굉장히... 이상하다는 걸 알게 돼요.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방식으로 작동해요. 그리고 그 이상함이 저를 어떤 경계까지 데려가거든요."

"어떤 이상함이요?"

박양자 박사가 화이트보드에 그림을 그렸다.

"양자 중첩. 전자 하나가 관측되기 전에는 여러 위치에 동시에 있어요. 확률의 파동으로만 존재하다가, 관측 순간에 하나의 위치로 '결정'돼요. 이게 실재예요. 실험으로 수없이 확인됐어요."

"그게 영원이랑 어떻게 연결돼요?"

"연결한다기보다는 비유로 생각해볼 수 있어요.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영원한 현재', 하나님에게는 모든 시간이 동시에 있다는 것. 우리 인간은 선형적으로 시간을 경험하지만, 더 높은 차원의 관점에서는 모든 순간이 동시에 볼 수 있다는 아이디어. 이게 수학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가 아니에요."

이요한이 말했다. "상대성이론이랑도 비슷하지 않아요? 아인슈타인이 시간도 상대적이라고 했잖아요."

"맞아요," 박양자 박사가 말했다. "상대성이론에서 시간은 절대적이지 않아요. 빛의 속도에 가까워지면 시간이 느려져요. 그러면 이론적으로 빛의 속도로 이동하면 시간이 멈춰요. 빛 자체의 관점에서는 시간이 없어요. 오늘 이 스튜디오에서 나온 빛이, 우주의 저 끝에서 받아질 때, 그 빛 자체에게는 발생과 도달이 동시예요."

"와," 이윤혜가 말했다. "그게 하나님의 영원한 현재랑 비슷한 구조네요."

"비유로는요," 박양자 박사가 신중히 말했다. "하지만 빛이 하나님은 아니에요. 그리고 수학적 구조의 유사성이 실재의 동일성을 의미하지는 않아요."

카림이 말했다. "그래도 그 유사성이 흥미롭네요. 과학이 발전할수록 신학과 대화할 여지가 오히려 늘어나는 것 같아요."

박양자 박사가 말했다. "저도 그 느낌이 들어요. 뉴턴 역학까지는 세계가 매우 기계적으로 작동하는 것 같았어요. 원인과 결과, 결정론적이고. 그래서 오히려 신이 필요 없다는 느낌을 줬어요. 그런데 양자역학이 나오면서 세계가 훨씬 더 열린 구조라는 게 드러났어요. 불확정성이 있고, 비국소성이 있고, 얽힘 현상이 있고... 이 세계가 우리 상식보다 훨씬 더 이상한 곳이라는 게."

서충성 목사가 말했다. "C.S. 루이스가 말했어요. 기독교는 처음에는 복잡해 보이지만, 알아갈수록 단순해진다. 반면 세계는 처음에 단순해 보이지만, 알아갈수록 복잡해진다. 어느 날 그 두 복잡함이 만나는 지점이 있지 않을까요?"

박양자 박사가 노트에 뭔가를 적었다.

"오늘 목사님이 하신 말씀 중에 그게 제일 마음에 남아요."

"그게 박사님한테 영원에 대한 신앙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어요?" 김준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박양자 박사가 잠시 침묵했다.

"모르겠어요. 저는 지금 경계에 서 있어요. 과학의 언어가 끝나는 그 경계에서. 그 너머로 들어가려면 다른 언어가 필요한데, 저는 그 언어를 아직 모르는 것 같아요."

서 목사가 말했다. "그 경계에 서 계신 것 자체가 이미 시작이에요."

"그게 어떤 의미예요?"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했잖아요. 우리 마음은 당신 안에서 쉬기까지 쉬지 못한다고요. 그 경계에서의 불안함, 더 알고 싶다는 갈망, 그게 사실은 영원을 향한 안테나예요."

박양자 박사가 조용히 앉아 있었다.

이요한이 말했다. "박사님,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될까요?"

"네."

"지금까지 연구하면서 가장 경이로웠던 순간이 언제예요? 아, 이건 진짜 신기하다, 이거 내가 설명 못 하겠다, 그런 순간."

박양자 박사가 미소 지었다.

"양자 얽힘(Quantum Entanglement) 실험 결과 봤을 때요. 두 입자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하나를 측정하면 동시에 다른 하나의 상태가 결정돼요.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아인슈타인이 '귀신같은 원거리 작용(spooky action at a distance)'이라고 불렀을 정도로요. 그 실험 결과 처음 봤을 때, 논문을 읽다가 잠깐 멈췄어요. 이 우주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연결되어 있구나, 라는 느낌이."

모두가 조용했다.

서 목사가 나지막이 말했다. "성경에 이런 말이 있어요. 그분 안에서 우리가 살고, 움직이고, 존재한다(행 17:28).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 그게 어쩌면 그 말의 과학적 그림자일 수도 있어요."

박양자 박사가 눈을 반짝였다.

제11장 — 중동 기자의 세 종교 비교 (카림 알-파루크의 현장 보고)

"카림 씨," 김준영이 말했다. "오늘 종교 간 대화에서 균형 잡힌 시각을 많이 보여주셨는데요. 레바논에서 자라면서 세 종교를 다 경험하셨잖아요. 기독교·이슬람·유대교가 각각 영원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비교해주시겠어요?"

카림이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레바논에서 자란 건 종교학 현장 연수예요." 웃음. "우리 동네에 교회, 모스크, 유대교 시나고그가 다 있었어요. 명절 때 냄새가 다 달랐어요. 크리스마스엔 케이크, 라마단엔 빵 굽는 냄새, 유월절엔 마짜 과자. 그 냄새들을 맡으며 자랐어요."

이윤혜가 말했다. "그게 낭만적이네요."

"전쟁 나기 전까지는요," 카림이 담담하게 말했다. "레바논 내전 때 같은 동네 사람들이 서로 죽이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저는 종교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는 걸 어릴 때부터 알았어요."

잠깐 침묵이 흘렀다.

"자, 영원에 대한 세 종교 비교로 돌아가자면."

카림이 화이트보드에 세 단어를 썼다.

기독교: 성육신   이슬람: 초월성   유대교: 계약 신실성

"세 종교 다 하나님의 영원성을 믿어요. 그런데 강조점이 달라요. 기독교는 그 영원하신 분이 역사 속으로 직접 들어오셨다는 걸 강조해요. 성육신.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셨다는 것이 기독교의 가장 독특한 주장이에요."

서 목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슬람은 하나님의 절대적 초월성을 강조해요. 알라는 인간과 절대적으로 다르신 분이에요. 어떤 피조물과도 비교될 수 없고, 어떤 피조물과도 섞일 수 없어요. 성육신 같은 것은 하나님의 위엄을 훼손하는 것으로 봐요. 그래서 이슬람에서 예수님은 위대한 선지자지만 하나님의 아들은 아니에요."

박양자 박사가 말했다. "그 두 주장이 논리적으로 공존할 수 없는 거잖아요."

"맞아요," 카림이 말했다. "기독교가 맞다면 이슬람이 틀리고, 이슬람이 맞다면 기독교가 틀려요. 둘 다 맞을 수는 없어요. 이 부분을 '다 같은 거야'라고 뭉개는 건 두 종교 모두에게 불성실한 거예요."

"유대교는요?" 이윤혜가 물었다.

"유대교는 구약의 하나님과의 언약, 계약 관계를 중심에 놓아요. 하나님의 영원성은 그분의 언약의 영원성으로 나타나요.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 다윗에게 하신 약속 — 이것들이 영원히 유효하다는 거예요. 그게 유대 민족의 역사적 고통 속에서도 신앙을 유지하는 근거예요."

서 목사가 말했다. "브루그만도 그 언약적 관점을 강조하죠."

"맞아요," 카림이 말했다. "브루그만이 유대교 구약 전통에서 기독교 신학을 끌어내는 사람이니까요."

이요한이 말했다. "결국 기독교가 세 종교 중에서 영원 개념을 가장 '역사적'으로 이해하는 것 같아요. 철학적 추상이 아니라, 역사 속 사건 — 성육신, 십자가, 부활 — 에 근거하는."

카림이 말했다. "그게 기독교의 강점이기도 하고, 가장 공격받는 지점이기도 해요. '역사적으로 일어났다'고 주장하면, 역사적으로 검증할 수 있어야 하거든요.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라고 하면, '그럼 증명해봐'라는 도전이 오는 거예요."

이요한이 말했다. "그 도전에 기독교가 어떻게 답하는지가 신학의 핵심 과제 중 하나죠. N.T. 라이트 같은 역사학자들이 그 작업을 많이 했고요."

서 목사가 말했다. "부활의 역사성에 대한 증거들이 상당히 탄탄해요. 텅 빈 무덤, 부활하신 예수를 본 500명 이상의 증인들, 제자들의 급격한 변화... 그 변화를 설명하는 가장 합리적인 설명이 부활이라는 거예요."

박양자 박사가 말했다. "그 논증은 제가 아직 충분히 검토하지 못했어요. 더 읽어봐야겠어요."

최서인 편집장이 말했다. "리스트 주시면 제가 출판사에서 서적 보내드릴게요."

웃음이 터졌다.

제12장 — 서충성 목사의 열린 강의 (믿음을 강하게 하는 논증 4가지)

[자막: 종합정리 시간]

"자, 이제 종합정리 시간입니다," 김준영이 말했다. "서충성 목사님, 오늘 여기 모인 분들한테 '지금 예수를 믿는 사람의 믿음을 강하게 할 수 있는 논증' 정리해주실 수 있어요? 그리고 믿음이 아직 없는 분들한테도 생각할 거리가 되는."

서충성 목사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말했다.

"오늘 긴 여정을 함께했는데요. 정리하면 네 가지 논증이 나와요. 제가 하나씩 설명드릴게요. 이게 강의실에서 나온 이야기가 아니라, 각 신학자들이 실제 삶에서 씨름하며 나온 이야기라는 걸 기억하면서."

화이트보드에 네 가지를 적었다.

논증 1: 성육신 논증
논증 2: 부활 논증
논증 3: 피난처 논증
논증 4: 관계적 영원 논증

"첫째, 성육신 논증이에요. 아우구스티누스에서 바르트까지 이어지는 핵심이에요. 영원하신 하나님이 유한한 시간 속으로 들어오셨어요. 이게 성육신이에요. 영원이 시간을 무시하거나 피하거나 제거한 게 아니라, 시간을 구속하기 위해 시간 안으로 뛰어드셨어요."

이윤혜가 조용히 받아 적었다.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이게 세상 어떤 종교도, 어떤 철학도 제시하지 못한 유일한 주장이에요. 무한이 유한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 이 사건이 사실이라면, 영원은 더 이상 저 먼 추상적 개념이 아니에요. 영원이 나와 같은 시간, 같은 역사 속으로 오셨어요."

이요한이 말했다. "믿음의 근거는 '영원하신 분이 나를 위해 오셨다'는 거네요."

"맞아요. 둘째, 부활 논증이에요. 몰트만의 핵심이에요. 예수의 부활은 단순히 기적 이야기가 아니에요. 부활은 영원한 생명이 역사 안에 침투한 사건이에요. 역사상 가장 확인하기 쉬운 반증이 있는 사건이기도 해요. 시신을 보여주면 됐거든요. 그런데 당시 로마 당국도 유대 지도자들도 시신을 보여주지 못했어요."

카림이 말했다. "역사적으로 빈 무덤은 부인된 적이 없죠. 논쟁은 그게 부활 때문이냐 다른 이유 때문이냐는 거지."

"맞아요," 서 목사가 말했다. "그리고 제자들의 변화가 설명이 필요해요. 예수가 처형되던 날 다 도망갔던 겁쟁이들이, 갑자기 목숨을 걸고 부활을 증언했어요. 이 변화를 설명하는 가장 간단한 설명이 '정말 부활하신 분을 만났다'는 거예요."

"믿음의 근거는?"

"부활은 역사적 사건이에요. 영원한 생명이 이미 증명됐어요. 죽음이 끝이 아니에요. 요한복음 11장 25절.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서 목사가 계속했다.

"셋째, 피난처 논증이에요. 칼뱅부터 브루그만까지. 시편 90편 1절.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영원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거처예요. 집이에요."

이윤혜가 말했다. "제 블로그에서 이 부분이 제일 약했던 것 같아요."

"맞아요. 선생님이 '하나님이 창조 이전부터 계셨다'는 것에서 멈추셨는데, 그 영원하신 분이 *나의 집*이 되어주신다는 데까지 가야 해요. 내가 덧없고 연약할수록, 영원한 하나님이 더욱 필요해요. 불안 앞에서, 죽음 앞에서, 영원하신 분 안에 피하는 것이 신앙이에요."

박양자 박사가 말했다. "그 논증이 제게 가장 현실적으로 다가와요. 왜냐면 저는 지금 그 불안을 느끼거든요. 경계에서의 불안."

서 목사가 온화하게 말했다. "그 불안이 문이에요."

"넷째, 관계적 영원 논증이에요. 브루그만의 핵심이에요. 영원한 하나님이 나의 이름을 아신다는 것, 나의 오늘을 아신다는 것. 이것이 영원의 실천적 의미예요. 영원은 미래 어딘가에 있는 게 아니에요. 지금 이 순간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경험돼요."

서 목사가 로마서 8장 38-39절을 읽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방이 조용해졌다.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해요. 그 사랑이 지금 나에게 향해 있어요. 이것이 기독교의 영원 개념의 실천적 핵심이에요."

최서인 편집장이 조용히 말했다. "저 이 네 가지 논증으로 책 한 권 쓸 수 있겠는데요."

"그러세요," 서 목사가 웃었다.

에필로그 — 낭만에 대하여, 다시

[자막: 촬영 종료 후]

조명이 꺼지고, 카메라가 멈췄다. 스태프들이 장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다섯 명의 패널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도 먼저 떠나려 하지 않았다.

이윤혜가 조용히 말했다. "오늘 제가 블로그에 쓴 것들이 잘못됐다기보다, 무언가 향하는 방향이 없었던 것 같아요. 정보는 있었는데 목적지가 없었달까."

서충성 목사가 말했다. "그래서 선생님이 허전함을 느끼셨던 거예요. 영원에 대한 모든 정보를 모아도, 그 영원하신 분과 관계가 없으면 채워지지 않아요.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그 불안이에요."

이윤혜가 오래 침묵했다가 말했다. "그 분과 관계를 갖는다는 게 어떻게 시작하는 거예요?"

서 목사가 말했다. "기도예요. 아주 간단한 기도. '하나님, 당신이 계신다면, 제게 보여주세요. 당신을 알고 싶습니다.' 그게 시작이에요."

"그렇게 단순해요?"

"신앙의 시작은 복잡하지 않아요. 복잡해지는 건 나중이에요." 웃음.

카림이 말했다. "저는 오늘 기독교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어요. 레바논에서는 기독교가 너무 문화적이고 정치적인 것과 얽혀 있어서, 그 너머의 본질을 보기 어려웠거든요. 오늘 신학적으로 이야기하니까 다르게 느껴져요."

박양자 박사가 말했다. "저는 오늘 집에 가서 부활에 관한 역사적 논증을 더 읽어볼 것 같아요. 서 목사님, 추천 도서 있어요?"

"N.T. 라이트의 「하나님 아들의 부활」이 있어요. 방대하지만 탄탄한 역사적 논증이에요."

최서인 편집장이 메모했다. "저도요."

이요한이 혼자 조용히 앉아 있다가 말했다.

"저는 오늘 신학을 공부하면서 잃어가던 뭔가를 다시 찾은 느낌이에요. 너무 많이 알려고 하다 보니까, 그냥 믿는 것이 어려워졌거든요. 오늘 아우구스티누스부터 브루그만까지 들으면서, 이분들이 다 결국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는 게 느껴졌어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부활. 그게 영원의 핵심이에요."

스튜디오 창밖으로 서울의 저녁 하늘이 보였다. 노을이 지고 있었다.

김준영이 혼자 카메라 앞에 서서, 이미 꺼진 카메라를 향해 말했다.

"오늘 이상하게 마음에 뭔가가 걸렸어요. 제가 진행자라서 중립적으로 진행했는데... 솔직히 말하면, 오늘 이야기들이 그냥 지적 유희로 지나가지 않더라고요.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의 그 말. '우리 마음은 당신 안에서 쉬기까지 쉬지 못합니다.' 저도 그 불안이 있는 것 같아요. 오래된 불안."

그는 잠시 침묵했다.

"다음 편에서는... 그 불안을 좀 더 파봐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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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비에서 모두가 각자 코트를 입을 때, 박양자 박사가 서충성 목사에게 조용히 물었다.

"목사님, 하나님이 정말 계신다고 어떻게 알아요? 가장 솔직한 답으로."

서 목사가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저도 증명은 못 해요. 하지만 그분이 없다고 가정하면 이 세계가 설명이 안 되는 부분들이 있어요. 그리고 제 삶에서 그분이 개입하신 것 같은 순간들이 있어요. 설명하기 어렵지만 지울 수가 없는 순간들이요."

"그게 신앙인가요?"

"그게 시작이에요. 신앙은 그 시작을 붙드는 거예요. 확실성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는 게 아니라, 지금 여기서 신뢰하는 것."

박양자 박사가 코트를 여미며 말했다.

"그 경계에서 한 발 더 내딛는 게 그렇게 무서운 건지 몰랐어요."

"무서운 게 당연해요," 서 목사가 웃었다. "저도 그랬어요. 하지만 내딛고 나면, 혼자 걷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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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혜는 지하철역으로 걸어가다가 멈췄다.

핸드폰을 꺼내 메모장을 열었다. 그리고 적었다.

*하나님, 당신이 계신다면, 제게 보여주세요. 당신을 알고 싶습니다.*

손가락이 잠깐 떨렸다.

그리고 저장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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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하늘에 첫 별이 떴다.

♪ *낭만에 대하여 / 그대는 아는가 / 끝없이 펼쳐진 / 저 하늘 너머로...*

영원은 저 너머에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지금 여기에도 있었다.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태어난 그분이, 그 둘을 하나로 만드셨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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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오늘 등장한 신학자 및 핵심 논거*

| 신학자 | 시대 | 영원 개념 핵심 |
|--------|------|---------------|
|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 2-3세기 | 영원 = 로고스 그리스도 안에서만 완전한 의미 |
| 오리게네스 | 3세기 | 깊은 통찰 + 영혼선재설·만물회복설 오류 |
| 아우구스티누스 | 4-5세기 | nunc stans, 시간은 피조물, 불안은 영원을 향한 나침반 |
| 보에티우스 | 6세기 | Tota Simul Perfecta — 전체, 동시, 완전한 소유 |
| 안셀무스 | 11세기 | 존재론적 논증: 영원성은 하나님 본질에서 논리적 도출 |
| 토마스 아퀴나스 | 13세기 | actus purus: 변화 없으므로 시간 없음 |
| 장 칼뱅 | 16세기 | 영원 = 언약 백성의 피난처 (시편 90:1) |
| 칼 바르트 | 20세기 | 전·공·후시간성, 기독론적 집중 |
| 위르겐 몰트만 | 20세기 | 부활 = 영원이 역사에 침투한 사건, 고난 속 하나님 |
| 월터 브루그만 | 20-21세기 | 언약적 영원, 예언자적 상상력, 지금 여기서의 실천 |



이 이야기는 허구의 형식을 빌렸지만,
등장하는 신학자들의 논증과 인용은 실제 역사적 기록에 근거합니다.
♪ 낭만에 대하여 — 최덕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