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 히로시마 평화 뉴질랜드 평화의 소녀상 이야기 1
뉴질랜드 밀알 선교단
2026. 3. 11. 09:55
오클랜드에서 펼쳐진 갈등, 치유, 화해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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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바람이 기억하는 것들
오클랜드의 11월은 봄이다.
북쪽에서 온 사람들에게 이 나라의 계절은 언제나 낯설다. 단풍이 져야 할 때 꽃이 피고, 눈이 내려야 할 때 햇살이 내리쬔다. 뉴질랜드에서 서른 해를 살아온 박순례는 아직도 11월이 되면 가슴 한켠에 서늘한 기운이 내려앉는 것을 느낀다. 서울의 기억이, 몸 깊이 새겨진 계절의 감각이 여전히 그녀를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매일 아침 폰선비 공원 옆 카페 베란다에 나와 커피를 마신다. 오클랜드 항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이 자리는, 서른 해 전 남편 인철과 처음 이 나라에 발을 디뎠을 때부터 두 사람이 꿈꾸어온 장소였다. 인철은 5년 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지금 이 자리에는 순례 혼자뿐이지만, 그녀는 여전히 매일 이곳에 나온다. 마치 인철이 맞은편 의자에 앉아 있는 것처럼.
그날 아침, 순례의 핸드폰으로 카카오톡 메시지가 울렸다.
"어머니, 한인회 긴급 공지 보셨어요? 소녀상 문제로 난리 났어요."
딸 지현의 메시지였다. 순례는 커피잔을 천천히 내려놓고 한인회 단체 채팅방을 열었다. 수백 개의 메시지가 폭포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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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부: 모든 것이 시작된 곳 — 최초의 소녀상
1장. 청동 소녀
그것은 2011년 12월, 서울의 어느 수요일 오후에 시작되었다.
종로구 세종대로, 일본 대사관 앞에 두 명의 할머니가 접이식 의자에 앉았다. 쉬기 위해서가 아니라, 머물기 위해서. 두 분은 팔십 대의 노인으로, 일본이 완곡하게 “위안부 제도”라 불렀던 시스템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었다. 거의 한 세기 가까이 두 분은 침묵했다. 그 수요일, 두 분은 청동 소녀상이 자신들 옆에 세워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의자에 앉은 젊은 여성상, 두 손은 무릎 위에 얌전히 놓이고, 맨발은 땅에서 살짝 떠 있으며, 눈은 정면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그 표정에는 분노도 절망도 없었다. 다만 차분하고 흔들리지 않는 증언자의 눈빛만이 있을 뿐이었다.
동상은 조각가 김운성, 김서경 부부의 작품으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의뢰로 제작되었다. 원래는 영구 설치를 전제하지 않았다. 서울시는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그러나 두 할머니는 동상 옆에 앉아 있었고, 자원봉사자들은 추운 밤을 새우며 자리를 지켰으며, 동상은 그렇게 남았다.
수요 집회는 1992년부터 시작되었다. 예외 없이, 매주 수요일, 일본 대사관 앞에 생존자들이 모여 공식 인정과 사과를 요구했다. 2011년에 그것은 1000번째 집회였다. 동상은 그 이정표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또한 할머니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십 년 동안, 기다리던 말을 듣지 못한 채 할머니들이 눈을 감았다.
동상 옆의 빈 의자는 찾아오는 이들을 위한 것이었다. 우리 곁에 앉으세요, 라고 조형물이 말하는 것 같았다. 기억해주세요.
이 년도 채 되지 않아 복제품이 전 세계에 세워지기 시작했다.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독일. 각각의 설치는 일본 정부의 항의를 불러왔다. 그 항의들은 역설적으로 동상들에 더 많은 관심을 끌어당겼다. 모든 대륙에 흩어진 한국 디아스포라는 이 단순한 청동 소녀 안에서, 세대를 넘어 말없이 안고 살아온 무언가의 구심점을 발견했다.
멀리서 이 모든 것을 지켜보던 사람들 중에 박지현이라는 젊은 여성이 있었다. 당시 오클랜드 대학교 대학원생으로, 포스트식민주의적 기억과 디아스포라 정체성에 관한 논문을 쓰고 있었다. 어느 날 밤늦게 인터넷 기사에서 동상 이야기를 읽은 그녀는 왜인지 스스로도 잘 모르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 이유를 이해하는 데 3년이 더 걸렸다.
2장. 할머니의 마지막 말
이해는 하나의 영상을 통해 찾아왔다.
광주의 작은 아파트에서 촬영한 다큐멘터리 인터뷰로, 한국어 자막과 함께 유튜브에 올라온 것이었다. 인터뷰에 응한 여성은 팔십 대 후반의 김복동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의자에 꼿꼿이 앉아, 두 손을 모으고, 맑은 눈빛으로 말했다.
"나는 내 이름을 되찾고 싶다. 그것뿐이야."
할머니는 2019년, 아흔두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일본 정부로부터 공식적인 인정을 받지 못한 채로.
지현은 그 영상을 여섯 번 보았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 저 뭔가 하고 싶어요. 오클랜드에 동상을 세우고 싶어요."
전화선 너머로 긴 침묵이 흘렀다.
"왜 나한테 말하는 거야?" 순례가 마침내 물었다.
"어머니이니까요." 지현의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어머니가 저한테 한 번도 하지 않은 이야기가 있는 것 같아서요."
또 다른 침묵. 이번엔 더 길었다.
"저녁에 집에 와라," 순례가 말했다. "밥 지어놓을게."
그날 밤에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하지만 지현은 어머니 집으로 운전해 가면서, 오랫동안 땅속에 묻혀 있던 무언가가 아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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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균열
3장. 소녀상 프로젝트
오클랜드 한인회 사무국장 김동혁은 그날 오후 내내 전화를 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소식은 아침에 터졌다. 오클랜드 시의회가 평화의 소녀상 설치 신청을 공식 검토 의제로 올렸다는 뉴스가 뉴질랜드 헤럴드 온라인판에 실렸고, 일본 교민 사회에 알려지는 순간 즉각적인 반발이 시작된 것이다.
사무실 전화기가 울렸다.
"여보세요, 오클랜드 한일친선협회 모리타입니다."
동혁은 숨을 고른 뒤 수화기를 들었다. "네, 김동혁입니다."
모리타 겐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속에 담긴 긴장은 감출 수 없었다. 그는 오클랜드에서 20년째 살고 있는 일본인 사업가로, 건축 설계 회사를 운영하며 뉴질랜드 한일 문화 교류에 여러 번 기여한 사람이었다.
"직접 만나서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오해가 생기기 전에."
동혁은 잠시 망설였다. 한인회 내부에서도 의견이 갈렸다. 소녀상 설치는 3년 전부터 일부 교민들이 추진해온 사안이었고, 공식 입장을 정하지 못한 채 흐지부지되다가, 올해 들어 지현을 중심으로 한 젊은 교민들이 다시 불을 붙여 시의회에 공식 신청까지 넣은 것이다.
"내일 오전 10시, 스카이타워 앞 카페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하죠." 모리타가 말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동혁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11월의 오클랜드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그 맑음이 오히려 불길하게 느껴졌다.
4장. 두 세계의 온도
박지현은 오클랜드 대학교 한국학 강사다. 서른세 살의 그녀는 어머니 박순례가 이민 1세대라면 자신은 이민 1.5세대다. 열 살에 뉴질랜드에 왔으니 한국어와 영어 모두 자기 언어지만, 어느 쪽도 완전한 모국어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을 늘 안고 산다.
헤럴드 기사가 나온 다음날, 일본계 뉴질랜드인 동료 야마구치 사토코가 연구실로 찾아왔다.
사토코는 히로시마 이민자 3세였다. 할아버지는 원폭 투하 당시 열네 살이었고,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전후 혼란 속에 뉴질랜드로 이주했다.
"지현 씨, 솔직하게 말해도 될까요?"
사토코는 한국어를 꽤 잘했다. 지현과 친해진 후에 배운 것이었다. 처음에는 각자의 역사적 배경 때문에 서먹했지만, 진지한 학문적 교류를 거듭하면서 진정한 우정을 쌓아왔다.
"물론이죠."
"동상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명패에 일본을 비판하는 내용이 들어가면, 여기 일본 교민들뿐 아니라 히로시마 피해자 후손들도 방어적이 될 거예요. 우리 할아버지도 그 전쟁의 피해자이거든요."
지현은 잠시 말이 없었다.
"사토코 씨 말이 맞아요. 그런데, 피해를 입힌 사람들과 피해를 입은 사람들 사이에서 중립을 찾는 게 과연 가능한 건가요?"
"가능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사토코가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적어도 이 뉴질랜드 땅에서는, 우리가 그것을 시도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는 양쪽 다 이방인이잖아요."
5장. 일본인들의 목소리
모리타 겐지는 밤새 잠을 못 잤다.
소녀상 소식을 처음 들은 것은 일본 교민 커뮤니티 SNS를 통해서였다. 헤럴드 기사를 공유하며 달린 댓글들은 이미 격앙되어 있었다.
"또 반일 감정 부추기는 거냐." "사과할 것 다 했는데 언제까지 이걸 끌고 다니는 거야." "뉴질랜드까지 와서 이런 걸 봐야 하나."
모리타는 이런 반응들을 이해하면서도 동시에 불편했다. 그 자신도 일본인이었고, 일본의 역사적 행위에 대해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어린 시절 할머니에게서 전쟁 이야기를 들었다. 할머니는 전쟁 중 남편을 잃고, 집도 잃고, 오랜 세월 가난 속에 살았다. 할머니에게 전쟁은 승리가 아니라 재앙이었다.
하지만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그는 솔직히 무지했다. 학교에서 배운 적이 없었다. 성인이 되어 인터넷으로 접했을 때는 이미 너무 많은 논쟁이 뒤엉켜 있었고, 어디서부터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막막했다.
다음날 아침, 스카이타워 앞 카페.
"저는 소녀상 설치 자체를 무조건 반대하는 게 아닙니다." 모리타가 먼저 말을 꺼냈다.
동혁은 예상치 못한 시작에 잠시 당황했다.
"하지만 여기 일본 교민들의 감정을 고려해줬으면 합니다. 특히 명패 내용이 문제예요.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이라는 표현이 들어간다면, 많은 일본인들이 이것을 자신들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일 겁니다."
"그 감정 자체는 이해합니다. 그런데 모리타 씨, 위안부 할머니들이 겪은 일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은 부정하실 수 없잖아요."
"부정하지 않습니다." 모리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하지만 저는 그 전쟁을 일으킨 세대가 아닙니다. 제 자식들은 더더욱 그렇고요."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창밖으로 오클랜드의 가을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히로시마에 가본 적 있으세요?"
"물론입니다. 어릴 때 부모님과 함께 평화기념관에 갔었어요."
"거기서 어떤 느낌을 받으셨나요."
모리타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며 말했다. "아이들의 도시락통이 기억나요. 타버린 도시락통. 그 앞에서 제 어머니가 말없이 조용히 우셨어요."
"그 아이들의 죽음과, 위안부 할머니들의 고통은 같은 전쟁이 만든 것입니다." 동혁이 말했다. "둘 다 '총력전'이라는 이름의 괴물이 삼킨 사람들이에요."
모리타는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6장. 한인회 총회
한인회 내부 갈등은 밖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복잡했다.
11월 셋째 주, 임시 총회가 열렸다. 오클랜드 한인 커뮤니티 센터 회의실에는 50명이 넘는 교민들이 모였다. 이민 1세대 어른들부터 지현 또래의 1.5세대, 뉴질랜드에서 태어난 2세대까지 세대가 뒤섞였다.
"소녀상은 민족의 자존심 문제입니다!" 한 중년 남성이 외쳤다.
"그런 식으로 접근하면 뉴질랜드 주류 사회에서 우리만 고립됩니다!" 다른 목소리가 반박했다.
"일본인들 눈치 볼 필요 없어요. 우리가 틀린 게 없잖아요!"
"틀리고 맞고의 문제가 아니라 현명하게 접근하자는 거예요!"
가장 날카로운 발언은 60대 초반의 정명수에게서 나왔다. 오클랜드에서 수산물 무역업을 하는 그는 일본 기업들과 거래가 많았다.
"소녀상 세우면 우리 비즈니스에 어떤 영향이 오는지 생각해봤습니까? 이건 현실적인 문제예요. 역사 감정으로만 볼 수 없어요."
그 말에 회의실이 술렁였다.
지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명수 씨, 죄송하지만 저는 할머니들의 명예를 비즈니스와 저울질하는 이야기는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너무 이상적이야. 현실을 봐요."
"현실이요? 돌아가신 할머니들이 수십 년을 버텨온 것도 현실 아닌가요? 침묵을 강요받은 세월이 현실 아닌가요?"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지현의 눈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때 박순례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7장. 부끄러운 역사? — 가장 깊이 파고드는 주장
순례가 앞으로 걸어나가기 전, 또 다른 목소리가 끊고 들어왔다. 부산 출신으로 1990년대에 이민 온 70세의 전직 수학 교사, 최병갑이었다.
"아무도 듣고 싶지 않은 말을 하겠습니다."
회의실에 긴장감이 흘렀다.
"일본 역사가들만이 아니라 한국 역사가들 중에도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많은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갔거나, 돈이 필요했던 가족에 의해 팔려갔다는 것이죠. 어떤 분들은 지금 말하는 성매매에 종사했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정말로 이 이야기를 — 한국 사회, 한국 가족, 한국의 가난을 반영하는 이 이야기를 — 뉴질랜드 공원에 동상으로 세워야 합니까? 이것은 우리가 조용히 안고 가야 할 부끄러운 이야기가 아닙니까?"
회의실이 두 동강 났다. 몇 사람이 소리를 질렀다. 또 몇 사람은 굳어버렸다.
"그건 일본 측 주장입니다!" 누군가 외쳤다.
"역사적 기록에는 논쟁의 여지가 있습니다," 최병갑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저는 그 여성들이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게 아닙니다. 이야기가 동상 하나로 단순하게 정리될 수 없을 만큼 복잡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 한국에 대해 이미 오해가 많은 이 나라에 — 공개적으로 알리는 것이 우리의 위상을 높이는 게 아니라 오히려 망신을 자초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우리나라가 힘이 없었기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그가 계속했다. "나라가 점령당했고, 그 무력함 때문에 끔찍한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무력함을 영원히 청동에 새겨두어야 합니까?"
박순례는 앞쪽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다 발언대 옆에 서서, 소음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1분이 꼬박 걸렸다.
8장. 어머니의 증언
회의실의 모든 시선이 박순례에게 향했다. 그녀는 잠시 조용히 서 있다가 입을 열었다.
"저는 박순례입니다. 이민 1세대예요. 30년 전 이 나라에 왔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제 어머니 이야기, 그러니까 지현이 외할머니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아서 일어섰습니다."
그녀는 잠시 멈췄다.
"제 어머니는 위안부 피해 생존자이십니다."
회의실이 완전히 조용해졌다.
"어머니는 평생 한 번도 그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어요. 저도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에야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수십 년을 그 기억을 혼자 짊어지고 사셨어요. 누가 알까봐, 손가락질받을까봐, 부끄러운 사람 취급받을까봐."
순례의 목소리가 한순간 떨렸다.
"제가 뉴질랜드에 오기 1년 전, 어머니가 저한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나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왜 평생 부끄러워해야 했는지 모르겠다.'고. 그게 그 주제에 대한 어머니의 마지막 말씀이었습니다."
순례는 고개를 들어 회의실을 둘러보았다.
"최병갑 씨는 우리의 나라가 힘이 없어 생긴 일이니 청동에 새겨두지 말자고 하셨습니다. 저는 다른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더 약한 것이 무엇입니까 — 여성들을 지키지 못한 나라입니까, 아니면 그 여성들에게 그 일에 대해 침묵하라고 요구한 나라입니까?"
회의실이 고요해졌다.
"소녀상이 필요한 이유는 제 어머니 같은 분들이 더 이상 자신의 고통을 부끄러움의 원천으로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을 민족 문제라고 부르든 개인 문제라고 부르든, 제 어머니는 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분의 존엄이 빼앗겼습니다. 그것을 돌려드려야 마땅합니다."
그녀는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지현이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손이 차가웠다.
최병갑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정명수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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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탐색
9장. 다리를 놓다
2주 후, 뜻밖의 전화가 왔다.
"제 딸아이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모리타가 동혁에게 말했다. "한국 사람들과 일본 사람들이 소녀상을 놓고 싸우는 걸 보면서,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 추모와 함께 하면 어떨까'라고요."
동혁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히로시마 희생자 중에 조선인이 상당수 있었다는 것, 아십니까? 강제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이 히로시마에 살고 있었어요. 그들도 원폭 피해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이야기는 지금도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요. 폭탄에 두 번 지워진 것이죠. 처음에는 폭탄으로, 그다음에는 역사책에서."
전화를 끊고 나서 동혁은 오래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지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안에 조선인 피해자 추모비가 있어요," 지현이 말했다. "그런데 사토코 씨 말로는, 그 비석이 원래 공원 밖에 있었대요. 수십 년 동안. 같은 피해자인데 안에 들어오지 못한 거예요."
"그러면 소녀상과 히로시마는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동혁이 말했다.
"전쟁이 문 밖에 세워둔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죠," 지현이 말했다.
10장. 사토코의 할아버지
야마구치 히로시는 아흔다섯 살이었고 오클랜드의 요양원에 살고 있었다. 기억은 많이 흐릿해졌지만, 사토코가 찾아온 그날 오후에는 눈빛이 맑았다.
"할아버지, 히로시마 이야기 해줄 수 있어요?"
노인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평소에 그 이야기를 잘 하지 않았다.
"내가 히로시마에 있을 때," 그가 천천히 말했다. "조선에서 온 사람들이 있었어.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우리 집 근처에도 몇 가정이 살았어. 나하고 비슷한 나이 아이들도 있었고."
사토코는 숨을 죽이고 들었다.
"8월 6일에 폭탄이 떨어졌을 때, 그 애들도 다 죽었어. 일본 애들이나 조선 애들이나, 폭탄은 구별하지 않았으니까."
할아버지의 눈이 촉촉해졌다.
"그 애들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 그게 지금도 미안해. 일본 친구들 이름은 기억하는데, 그 애들 이름은..."
사토코는 할아버지의 손을 꼭 쥐었다.
"할아버지가 기억해주는 것 자체가 의미 있어요."
"동상을 세운다면," 그가 말했다. "그 애들도 넣어줘. 이름은 몰라도, 거기 있었다는 것만이라도."
11장. 이란에서 온 이야기
파리다 호세이니는 2년 전 이란에서 왔다. 테헤란 대학교 출신 사서로, 2022년 마흐사 아미니 사건 이후 상황이 위험해지자 뉴질랜드 영주권을 받은 사촌의 초청으로 나라를 떠났다.
"지현 씨, 소녀상 이야기 들었어요," 어느 날 점심을 먹으며 그녀가 조심스럽게 꺼냈다.
"이란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어요. 여성들이 겪는 일들을 공식적으로 기억하는 장소가 없어요. 아미니 사건 이후 시위에 나간 여성들이 구금되고 고문받았는데, 그것을 공적으로 기억하는 공간이 없어요. 그 이름들이 사라지고 있어요."
"소녀상이 한국 이야기만이 아니라면," 파리다가 말을 이었다. "이란 여성들 이야기도 거기 있을 수 있지 않을까요? 시간과 공간은 다르지만, 국가 권력이 여성의 몸을 통제하려 했다는 점은 같으니까요."
지현은 그 말을 오래도록 되씹었다. 그날 밤 일기에 이렇게 썼다.
"소녀상을 세우고 싶다는 처음의 마음은 외할머니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 히로시마의 조선인 아이들, 이란의 마흐사 아미니, 이름이 사라진 모든 사람들을 향해. 어쩌면 처음부터 하나의 고통만을 기억하려 했던 것이 이 모든 갈등의 씨앗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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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설교 — 한복판에 선 교회
12장. 모임
오클랜드 한인 교회는 마운트 이든 교외의 창고를 개조한 건물을 예배당으로 쓰고 있었다. 서충성 목사는 이 교회를 18년째 섬기고 있었다. 예순한 살의 그는 가족을 갈라놓는 논쟁들을 평생 들어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신중한 눈빛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공동체를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 상처를 덮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식탁 위에 올려놓는 것임을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12월 초, 소녀상 논쟁이 교민 사회의 SNS와 동네 입소문과 여러 가정의 저녁 식탁을 뒤흔들고 있을 때, 목사는 특별 주일 예배를 공지했다. 치유와 화해를 위한 모임.
그는 합의를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함께 있어달라고 했다.
그 주일 아침, 예배당이 가득 찼다. 1970년대에 온 어른들, 1990년대에 온 부모들, 오클랜드에서 태어나 부모의 음식과 조부모의 침묵으로만 한국을 아는 아이들. 그 사이에, 지현의 조용한 초대를 받은 일본 교민 몇 사람이 섞여 앉아 있었다. 모리타 겐지도 그중 하나였고, 예상치 못하게 사토코의 할아버지 야마구치 히로시도 휠체어를 타고 와 있었다.
파리다 호세이니는 대학의 이란 여성들 몇 명과 함께 뒤쪽에 앉았다.
최병갑도 그 자리에 있었다. 정명수도 왔다. 아내가 오라고 했기 때문에.
13장. 서충성 목사의 설교: "설령 그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서 목사는 강단에 서지 않았다. 사람들 사이, 바닥 위에 서서, 아무것도 손에 들지 않았다.
"형제자매 여러분, 이번 주에 우리 공동체 안에서 제가 직접 다루어야 할 말들을 들었습니다. 어떤 분들이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이야기가 우리가 말하는 것만큼 단순하지 않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어떤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갔다면? 가난이 가족들로 하여금 그런 선택을 하게 만들었다면? 이 역사에 부끄러움이 있다면 — 일본에만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한국에게도, 한국 사회가 자국의 여성과 빈민을 대우한 방식에게도?"
그는 그 질문을 공중에 잠시 띄워두었다.
"이것은 어려운 질문들입니다. 저는 이 질문들이 제기되지 않는다고 척하지 않겠습니다. 분노만으로 물리쳐질 수 있다고도 하지 않겠습니다. 역사는 언제나 동상보다 복잡합니다."
그는 멈추었다가 더 천천히, 더 또렷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오늘 여러분께 어려운 일 하나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그 주장들 중 가장 불편한 버전이 사실이라고 가정해보십시오. 오직 이 자리에서의 논의를 위해, 온전히 가정해보십시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그것은 전쟁이 자기 몸을 파는 것이 선택지 중 하나가 되는 세상을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가난과 점령과 폭력이 젊은 여성에게 남은 선택지를 그것으로 좁혀놓았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사회 진화론 — 강자가 규칙을 만들고 약자가 결과를 감당한다는 사상 — 이 이론이 아니라 살아있는 현실로 적용되었다는 뜻입니다. '강자가 정의다'라는 관념이 국가와 군대와 경제의 구조 속으로 스며들어, 마침내 개인을 먼지로 갈아버렸다는 뜻입니다."
"설령 논란이 되는 모든 사실이 가장 불편한 방향으로 정리된다 해도 — 그것은 그 시스템을 덜 끔찍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끔찍하게 만들 뿐입니다."
그는 앞줄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이 아닙니다. '그 개개인의 여성들은 피해자였는가, 아니면 선택을 한 것인가?'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어떤 세상이 그런 선택을 만들어냈는가? 어떤 제국, 어떤 경제, 정복당한 자의 권리와 여성의 몸에 대한 어떤 이데올로기가 — 열두 살짜리 소녀가 폭탄이 떨어지기 하루 전날 '집에 가고 싶습니다'라고 쓰고, 그 이름을 팔십 년 동안 아무도 모르는 상황을 만들어냈는가?"
뒤쪽에서 사토코가 일본어로 조용히 통역했다. 할아버지는 두 손을 무릎 위에 얹고 꼼짝하지 않았다.
"형제자매 여러분, 그 동상은 일본인을 향한 고발이 아닙니다. 일본이라는 국가를 향한 고발이기만 한 것도 아닙니다. 물론 일본의 지도자들이 내린 결정은 이름이 불려야 하고 기억되어야 합니다. 그 동상은 하나의 시스템을 향한 심판입니다 — 전쟁 중에 인간의 몸은 쓰일 수 있는 자원이라는 논리. 여성의 몸이 먼저. 가난한 자가 먼저. 식민지가 된 자가 먼저."
"그 시스템은 1945년에 끝나지 않았습니다. 오늘 지구 위에서 벌어지는 모든 분쟁 속에 살아있습니다. 이란 정부가 히잡을 벗은 여성들에게 하는 일 속에 살아있습니다. 강자가 약자에게 이렇게 말하는 모든 곳에 살아있습니다. '당신의 삶은 협상 가능하다. 당신의 존엄은 당신이 감당할 수 없는 사치다.'라고."
목사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기독교 신앙은 이것에 무어라 말합니까?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가르치는 신앙, 하나님의 형상, 이마고 데이는 무어라 말합니까? 협상될 수 없는 존엄이 있다고 말합니다. 정부가 주는 것도 아니고, 조약으로 보장받는 것도 아니고, 전쟁의 결과에 달린 것도 아닌 권리가 있다고 말합니다. 인간으로 창조된 그 행위 자체로부터 오는 권리. 우리는 이것을 자연법이라 부릅니다. 하나님이 주신 권리라 부릅니다. 천부 인권이라 부릅니다.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권리라 부릅니다."
"30년 동안 매주 수요일 일본 대사관 앞에 앉았던 그 할머니들은 복수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더 근본적인 무언가를 주장한 것입니다. 나는 존재한다. 나는 이름이 있다. 내게 행해진 일은 잘못된 것이다 — 우리나라가 더 강했더라면 그런 일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 땅 위의 어떤 권력도 인간에게 그런 일을 할 권리가 없기 때문에."
"그 여성들이 겪은 일을 보고도 '글쎄, 복잡한 문제지'라고 말할 수 있는 사회는 — 그 사회는 아직 권력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배우지 못한 것입니다. 권력은 우리 중 가장 약한 이를 보호하기 위해 주어지는 것입니다. 전쟁에 먹이로 바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가 멈추었다. 그리고 최병갑을 바라보았다.
"최 선생님께서 우리의 나약함을 청동에 새겨두어야 하냐고 물으셨습니다. 조심스럽게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리를 부끄럽게 해야 할 나약함은 한국이 식민지가 된 것이 아닙니다. 식민지는 지구상에서 가장 강한 민족들에게도 일어난 일입니다. 우리를 돌아보게 해야 할 나약함은, 지금 이 순간에도, 더 강했더라면 더 나은 대우를 받아 마땅했을 것이라는 유혹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회 진화론의 논리입니다. 그것이 제국이 사용한 논리입니다. 우리는 그 논리를 우리 자신에게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 동상이 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이 일이 일어났다. 이 일은 일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한국이 더 나은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이 일은 누구에게도, 어디에서도, 언제라도 일어나서는 안 되기 때문에. 그것만이 정의로운 세상을 세울 수 있는 유일한 토대입니다."
그가 예배당 한가운데로 돌아왔다.
"오늘 저는 이 자리에 모인 우리 모두에게 — 한국인, 일본인, 이란인, 마오리, 뉴질랜드인 — 한 가지 질문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누구의 잘못인가?'가 아닙니다. '우리는 여기서부터 어떤 세상을 만들 것인가?'입니다. 강자가 약자를 먹어치우고, 우리는 그저 더 강해지려는 세상입니까? 아니면 함께 이렇게 선언하는 세상입니까. 누구의 몸도 자원이 아니다. 누구의 삶도 도구가 아니다. 모든 인간은 국가가 부여하지도, 빼앗을 수도 없는 존엄을 품고 있다."
"그것이 바로 그 동상의 빈 의자가 기다리는 것입니다. 슬픔이 아닙니다. 죄책감이 아닙니다. 결단입니다."
설교가 끝나고 예배당은 오랫동안 고요했다.
그러다 야마구치 히로시가, 아흔다섯 살의 그 노인이, 사토코의 손 위로 자기 손을 얹었다.
"맞아," 그가 일본어로 낮게 말했다. "정확히 맞는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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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부: 다리
14장. 공동 선언
12월 중순, 전례 없는 일이 벌어졌다.
오클랜드 한인회와 일본-뉴질랜드 우정협회가 공동 선언문을 발표하기로 한 것이다. 모리타와 동혁이 수차례 만남을 거쳐 이루어낸 결과였다. 서 목사의 설교가 있던 다음 주 일요일, 모리타가 저녁 9시에 동혁에게 전화를 걸어오기 전까지는 불가능해 보였던 일이었다.
"이 문서에 서명하고 싶습니다. 제 이름을 올리고 싶습니다."
초안 작성은 지현과 사토코에게 맡겨졌다. 두 사람은 일주일 동안 카페와 도서관 구석을 오가며 한 단어 한 단어를 다듬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범죄'라는 표현은 꼭 들어가야 해요." 지현이 둘째 날 말했다.
"그 표현이 들어가면 일본 쪽 서명자들이 서명을 못 할 거예요." 사토코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일본인이 한 명도 서명하지 않는 공동 선언문은 공동 선언문이 아니잖아요."
"그럼 뭐라고 써요?"
"일어난 일을 씁시다. 누가 했다는 표제 문구가 아니라 — 그 일을 겪은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전쟁과 국가 권력에 의해 개인의 존엄이 유린되었다.'고. 그것이 진실입니다. 같은 것을 가리킵니다. 다만 사람들이 그 뒤에 숨을 깃발을 주지 않을 뿐이에요."
지현은 잠시 침묵했다.
"좋아요," 그녀가 마침내 말했다. "하지만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들은 — 첨부 교육 자료에 전부 담아야 해요. 희석 없이. 숨김 없이."
"동의해요." 사토코가 말했다.
공동 선언문의 핵심 문단은 이렇게 완성되었다.
"우리는 전쟁과 국가 권력에 의해 개인의 존엄이 유린된 역사를 함께 기억한다. 우리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피해자들과 일제 강점기 성 노예제의 피해 여성들, 그리고 역사의 변방에서 이름 없이 사라진 모든 이들이 같은 전쟁의 기계가 만들어낸 피해자임을 확인한다. 우리는 이 기억이 민족 간의 증오가 아니라, 인류 공동의 다짐이 되기를 바란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15장. 어머니와 딸
공동 선언 발표를 며칠 앞둔 어느 날 저녁, 지현은 어머니를 찾아갔다.
순례는 저녁을 혼자 먹고 있었다. 지현이 들어오자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어머니, 총회 때 외할머니 이야기 해주셔서 감사했어요. 큰 용기가 필요하셨을 텐데."
"거기서 처음으로 그 이야기를 공식적으로 했어. 이상하게 말하고 나니까 무거운 게 좀 내려가는 것 같더라."
"외할머니는 어떤 분이셨어요? 나는 너무 어렸을 때 돌아가셔서 기억이 없어요."
순례가 먼 곳을 바라보았다.
"밥을 잘 지으셨어. 고등어조림을 특히 잘 하셨는데, 어릴 때 내가 그걸 엄청 좋아했어. 노래를 좋아하셨어. 옛날 노래들. 아리랑은 물론이고, 내가 이름을 모르는 노래들도 많이 부르셨는데. 목소리가 부드러우셨어."
지현은 눈물이 날 것 같은 것을 참았다.
"이상한 거 있잖아," 순례가 말했다. "어머니가 그 비밀을 평생 감추셨는데, 그 때문에 나도 오랫동안 어머니가 어떤 분인지 잘 몰랐어. 고등어조림 잘 하시고, 노래 좋아하시는 분. 그게 어머니의 전부인데. 근데 그 비밀이 모든 것을 덮어버렸어. 오랫동안 어머니를 생각하면 비밀이 먼저 떠올랐어."
"그래서 소녀상이 필요한 거예요, 어머니. 외할머니에게 일어난 일이 더 이상 외할머니가 어떤 분인지를 가리지 않도록. 그 비밀이 부끄러움이 아니라, 외할머니가 살아남은 진실이 되도록."
순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이 맞아."
16장. 파리다의 선택
선언문 발표 전날, 파리다가 지현의 연구실을 찾아왔다.
"지현 씨, 저 이 선언문에 서명해도 될까요. 제 이름으로."
"파리다 씨, 이란 국적인데 괜찮아요? 고국에 있는 가족들한테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요?"
파리다가 조용히 웃었다.
"이미 이 나라를 떠난 사람이에요. 이란에서 제 이름은 아마 이미 어딘가 목록에 올라있을 거예요. 더 잃을 것이 없어요."
"나르게스라는 친구가 있어요. 아미니 시위 때 거리에 나갔다가 지금 감옥에 있어요. 저는 여기 뉴질랜드에서 자유롭게 살고, 그 친구는 감옥에 있어요."
"소녀상이 세워진다면, 거기에 나르게스도 있으면 좋겠어요. 이름이라도. 박복순처럼 기억받기를 바라요."
지현은 파리다를 꼭 안았다.
두 여자는 한동안 그렇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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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부: 치유
17장. 선언의 날
12월 21일. 동지.
북반구의 겨울은 일 년 중 낮이 가장 짧은 날. 이 남반구에서는 일 년 중 낮이 가장 긴 날.
오클랜드 올버니 공원에서 한일 교민 공동 선언문이 낭독되었다.
거의 200명이 모였다. 한국 교민, 일본 교민, 뉴질랜드 시민, 이란 이민자들, 대학생들, 기자들, 마오리 원로들.
모리타 겐지와 한인회장 이갑수가 나란히 섰다.
모리타가 영어로 읽었다. 이갑수가 한국어로 읽었다. 사토코가 일본어로 읽었다. 지현이 마지막으로 다시 영어로 읽었다.
박복순의 이름이 선언문 안에 있었다. 그 옆에, 나르게스 모하마디의 이름도. 이란에서 여성의 자유를 위해 감옥에 간 친구의 이름.
낭독이 끝나자 마오리 원로 토아 키루가 앞으로 나와 하카를 했다. 혼자가 아니었다. 젊은 마오리 청년들이 하나둘 합류했다. 그 소리가 공원을 가득 채웠다.
누군가 울기 시작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사람도, 또 옆에 있던 사람도.
박순례는 뒤쪽에서 조용히 서 있었다.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그저 오래되고 딱딱하게 굳어있던 무언가가 아주 천천히 녹아내리는 느낌을 받았다.
어머니. 저 여기 있어요.
18장. 다나카의 편지
공동 선언이 발표되고 일주일 후, 지현에게 편지가 왔다. 손으로 쓴 것이었다.
"박지현 씨에게. 저는 공청회에서 당신에게 반대했고, 소녀상에 반대하는 성명을 냈습니다. 그것이 잘못된 것이었다고 지금도 완전히 확신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 아이가 쓴 말을 들었을 때 — 박복순, 열두 살, 폭탄 떨어지기 하루 전날 — 제 안에서 무언가가 흔들렸습니다."
"저의 어머니도 히로시마 출신입니다. 그날 아침 어머니는 시 외곽에 있었기 때문에 살아남았지만, 많은 친구를 잃었습니다. 어머니는 평생 8월 6일이 되면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침묵이 무엇인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저는 여전히 역사 해석의 일부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쟁 앞에서 이름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특정 민족을 단죄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 자체를 단죄하는 것이라면, 저는 반대하지 않겠습니다. 다나카 료스케."
지현은 편지를 두 번 읽었다. 그리고 답장을 썼다.
"다나카 씨에게. 편지 감사합니다. 어머니의 침묵에 대해 이야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의 외할머니도 평생 침묵하셨습니다. 우리의 어머니들, 할머니들은 서로 다른 편에서 같은 전쟁의 피해자였습니다. 역사에 대해 당신과 모든 것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침묵보다 대화가 낫다고 믿습니다. 언제든 이야기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박지현."
19장. 소녀상이 세워지다
이듬해 봄,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
오클랜드 폰선비 공원 한켠에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졌다.
명패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이 동상은 전쟁과 국가 권력의 폭력으로 이름을 잃어버린 모든 여성과 어린이들을 기억합니다. 일제 강점기 성 노예제 피해 여성들,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피해자들 중 잊혀진 이름들, 그리고 오늘도 자신의 인간다움을 위해 싸우는 이들에게 이 동상을 바칩니다. 우리는 기억합니다. 우리는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그 아래, 두 개의 이름이 작게 새겨져 있었다.
박복순. 1933-1945.
나르게스 모하마디. In solidarity — 연대하여.
제막식에는 5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였다. 한국 교민, 일본 교민, 마오리 원로들, 이란 이민자들, 뉴질랜드 시민들.
모리타 겐지는 국화꽃 한 송이를 들고 왔다. 야마구치 히로시는 요양원 직원의 도움을 받아 휠체어로 참석했다. 아흔다섯 살의 노인은 소녀상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박복순아." 그가 조용히 말했다. 소녀상만이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목소리로. "이름 기억 못 해서 미안했다. 이렇게 늦어서 미안하다."
파리다는 소녀상 앞에서 조용히 기도했다. 이슬람 방식으로. 나르게스를 위해.
토아 키루는 노란 꽃이 달린 코와이 나뭇가지를 가져와 동상 아래에 놓았다.
박순례는 딸 지현과 나란히 서 있었다. 그녀는 소녀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소녀상의 얼굴은 정면을 향하고 있었다. 두려움도 분노도 없이, 그냥 세상을 향해 눈을 뜨고 있었다.
어머니. 이제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돼요.
순례는 눈을 감았다. 11월의 기억이, 서울의 계절이, 어머니의 고등어조림 냄새가, 이름 모를 옛 노래의 선율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 기억들이 슬프지 않았다.
✦ ✦ ✦
에필로그: 봄
오클랜드의 봄은 11월이다.
계절은 여전히 낯설다. 하지만 지현은 이제 그 낯섦이 싫지 않다. 뒤집어진 계절처럼, 역사의 뒤집어진 논리를 바로잡는 일. 몸이 당연히 안다고 생각하는 것을 배워 나가고, 세상을 다시 읽는 것. 그것이 이 땅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임을 그녀는 이제 안다.
소녀상이 세워진 폰선비 공원에는 매일 꽃이 놓인다. 누가 갖다 놓는지 모른다. 한국 교민 가족이 놓을 때도 있고, 일본인의 손이 놓을 때도 있고, 학교에서 돌아가는 아이가 길가의 들꽃을 꺾어 아무 생각 없이 내려놓을 때도 있다.
이름이 없어도 된다. 누가 갖다 놓은 것인지 몰라도 된다.
꽃은 그냥 거기 있다.
박복순도 거기 있다. 나르게스도 거기 있다. 지현의 외할머니도 — 고등어조림 잘 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노래 부르던 그 분도 — 거기 있다.
이름을 기억받는 것.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소원이었던 사람들.
그들은 이제 기억된다.
오클랜드의 봄바람이 공원을 지나가며 동상의 어깨를 스쳤다. 옆의 빈 의자가 살짝 흔들렸다. 그 의자는 비어 있었다. 하지만 비어 있기 때문에 누구든 앉을 수 있었다.
당신도 앉아도 된다.
이 기억 옆에, 함께.
— 끝 —
✦ ✦ ✦
작가의 말
이 소설은 허구입니다. 모든 등장인물은 가상입니다. 그러나 이 소설이 다루는 역사적 사실들 — 위안부 제도의 존재,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피해자 중 강제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와 그 가족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내 한국인 원폭 피해자 위령비가 수십 년간 공원 밖에 있다가 이전된 역사, 그리고 나르게스 모하마디의 인권 활동 — 은 모두 역사적 사실입니다.
나르게스 모하마디는 이란의 인권 운동가이자 2023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입니다. 이 소설을 집필하는 시점에 그녀는 이란에 수감 중입니다.
일본 대사관 앞 수요 집회는 1992년 1월 8일에 시작되었습니다. 30년 이상 단 한 주도 거르지 않고 이어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정기 시위 중 하나입니다. 한국 정부에 등록한 240명의 생존자 중 2024년 기준으로 살아 계신 분은 열 명이 채 되지 않습니다.
박복순은 가상의 이름입니다. 하지만 그런 이름의 아이들이 히로시마에 실재했습니다. 그들도 같은 불 속에서 죽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기억합니다.
이 소설 속의 동상은 허구입니다. 그러나 이 소설이 묘사하는 논쟁 — 이런 종류의 기념물이 화해에 기여하는가 아니면 분열을 심화시키는가, 그리고 공공 공간에서 역사를 어떻게 담아야 하는가 — 은 전 세계 공동체에서 지금도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논쟁입니다.
서 목사가 그의 교인들에게 던지는 질문이 이 소설을 쓰면서 제가 품은 질문이기도 합니다.
"누구의 잘못인가?"가 아닙니다. "